-'제주에서 함께 하면 되지, 뭐가 문젠데?-
내 주변엔 다른 지방에서 살다가 제주로 이주해 온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중에는 남편이 외국인인 사람, 해외를 돌아다니다 제주에 정착한 사람, 힐링을 위해서 잠깐의 제주 살이를 하는 사람. 직장 때문에 혹은 남편을 따라서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 제주로 이사 온 사람들이 있는데 모두들 자기만의 사연과 이야기를 이삿짐과 함께 꾸려 낯선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대학교 때까지만 해도 다른 지역 친구들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부모님과 떨어져서 비행기씩이나(?) 타고 이 먼 제주까지 오다니. 그들의 세련된 말투와 우아함에 넋을 잃기도 했고, 특유의 다정한 매너는 두근두근 마음을 설레게 만들기도 했다. 그때는 그렇게 외지인(?), 이주민(?)이 많지 않아서 그들은 어디서나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들 역시 한라산 꼭대기에서 공을 차면 바다에 떨어진다는 둥, 비행기를 탈 땐 신발을 벗어야 한다는 둥 제주 사람들은 모두 친척이라는 둥 말도 안 되는 농담으로 우리들을 아연실색 만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모두들 우리와 어우러져 제주의 지리가 익숙하지 않으니 서로 안내를 해 주겠다 나서고, 제주의 문화를 모르니 이곳저곳에서 초대를 하고, 부모님과 떨어져 있으니 밥을 챙겨주거나 식사를 함께 하며 제주에 스며들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상황은 역전되고 말았다. 특히 직장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내 주변에 제주 토박이들을 찾는 게 오히려 더 힘든 일이 되었다. 평상시엔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가 고향 얘기를 하거나, 명절이 됐을 때 비행기 표를 끊었다는 말을 듣고서 퍼뜩 정신을 차려보면 지금은 외지인들 사이에 오히려 내가 희귀한 '제주도 토박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제주에서 태어나서 제주에서 공부하고 제주 남자를 만나 제주의 붙박이로 사는 나. 어렸을 적부터 소위 스카이(SKY) 대가 아니면 여자는 제주에 살아야 한다는 부모님의 억지 논리(?)에 따라 그냥 그렇게 살다 보니 또 어찌어찌 사는 게 지금이 되고 말았다.
나는 그때 왜 한 번도 타지에 있는 대학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을까? 가려고 떼를 썼거나 고집을 부렸다면 못 갈 것도 아니었는데. 그때의 솔직한 내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변명을 하자면 스무 살의 난 그게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타 지역에서의 경제적 부담도 많았고 육지 생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컸던 거 같다. 서울에 갔다가 혹시 사기꾼을 만나면 어떡하지? 엄마, 아빠 없이 어떻게 살지? 그렇게 서울은 나에게 눈 뜨고 코 베어갈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불모지 같은 곳이었으니까. 이렇게 서울은 너무도 낯선 곳이었기에 이 먼 제주로 온 그들은 나에게 새삼 용기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었다.
그런데 요즘은 다른 이유로 이주민이 신기하다. 우리는 가 본 적도 없는 해외를 안방 드나들 듯이 하는 사람, 세계를 제 마당인 냥 가는 것도 쉽고 오는 것에도 막힘이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왜 제주엘 왔을까? 다람쥐 쳇바퀴 삶을 살며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현실 제주도 원주민인 우리와는 달리 그곳에 그런 곳이(?)라고 생각하는 뜬금없는 곳에 작은 책방이나 커피숍을 열고, 예전 우리 부모님들이 자식 대엔 절대 물려주지 않겠다며 손사래 치는 농사를 자진해서 짓고, 노래와 그림과 춤으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 일부러 불편하고 어려운 삶을 선택한 그들. 생계는 꾸리고 있는지,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지, 넓지 않은 이곳이 답답하지는 않은지. 교육과 문화의 인프라가 잘 구성되어 있지 않은 이곳에서 적응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사실, 그들이 와 준 덕분에 제주는 많이 변하고 있다. 그들에 의해 제주의 새로움이 발견되고, 제주가 낯설어지고, 예전엔 몰랐던 것들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보물이 되어가고 있다. 주어지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독이 되었던 것일까? 아님, 지나치게 가까워서 제주의 본모습을 몰랐던 것일까? 제주의 해녀가, 제주의 주거 문화가, 제주의 음식과 갈옷이, 제주의 오름과 바다가 그렇게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곳이었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언제나 닿을 수 있고, 무심코 지나던 길이 올레길이고, 집 창가로 한라산이 보여서 그냥 이 자연은 당연히 내 삶의 일부분이고 생활의 작은 조각이라고만 생각했지 이것이 귀하고 특별해 보인 적은 솔직히 없었던 것 같다. 아니, 노력하지 않아도 숨을 쉬게 해 주는 공기처럼 그저 제주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또 다른 나였다. 그런데 그들의 손에 의해 제주의 섬 전체가 문학이 되고, 노래가 되고, 여행 코스가 되고, 체험 현장이 되는 모습을 보며 결혼식 날, 신부가 그렇게 이쁜 줄 몰랐던 신랑처럼 그림 속 제주는, 노래가 된 제주는, 사진의 주인공이 된 제주는 시와 수필 속 제주는 내가 알던 그 제주가 아니었다. 역사의 현장 곳곳이 처절한 슬픔의 노래가 되고 오름에서 바라본 제주의 감춰뒀던 눈부신 속살은 한 장의 사진이 되었고 소설 속의 제주는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하고 있었다. 그제야 아! 하는 탄성이 나오고, 떠나버린 뒤에 그가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던가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처럼 제주는 제주 사람에게도 특별한 곳으로 탈바꿈되고 있는 중이다.
사실, 그래서 느끼는 아쉬움도 크다. 제주의 땅에서 태어나 제주의 마음으로 자란 사람들이 제주를 노래하고 제주를 그리고 썼다면 훨씬 더 제주스럽지 않았을까? 제주의 바다와 산을 보고 자란 이가 더 제주스런 색깔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제주의 신화와 전설이 제주 작가에 의해 구연되고 극화된다면 더 찰지고 맛깔스럽게 표현되지 않을까? 최소한 드라마나 영화에서 딸이 엄마를 '어멍'이라고 부르거나 '할망'이라고 부르는 오류는 만들지 않았을 거란 아쉬움이 든다. '어멍'이나 '할망'은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가리킬 때 훨씬 많이 쓰는 말인데 제주 사람인 내가 봤을 땐 영 어색하고 쑥스럽다. 난 한 번도 엄마를 '어멍'이라고 할머니를 '할망'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옛날에 그랬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상하고 와닿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 제주 이주민과 제주 원주민들의 갈등을 보게 된다. 이주민들은 이주민들대로 느리고 답답한 행정이나 아는 사람으로 엮인 이곳이 불합리하고 이해가 안 가고, 원주민은 원주민 대로 마을 일이나 예전엔 그냥 넘어갔던 일이 왜 이렇게 하나하나 눈엣 가시가 되는지 함께 섞이지 않는 것이 불편하고 옛날 같지 않다고 하소연을 한다. 그래서 가끔 이주민은 이주민 대로 제주에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제주의 거친 텃세도 있었을 것이고, 느리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도 많았을 테고, 같은 이유로 제주에 머물다 보니 그들끼리(?) 더 애착이 가고 똘똘 뭉쳐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외지인들은 외지인대로 원주민들은 원주민대로 할 말도 많고 아쉬움도 컸을 것이다. 대한민국도 좁은데 작은 섬 속에서 이주민이니 원주민이니 편을 나누는 것도 우습고 억지스럽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얼마 전 제주 방송에서 찾았다. 안덕면 대평리 원주민과 이주민이 마을의 돌담 쌓기를 하며 인사를 나누고 서로 좋은 이웃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보여줬는데 무척 반가웠다. 돌담을 쌓는데도 돌을 열두 번 이리저리 움직여야 겨우 아귀를 맞춰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이장님의 설명은 이주민과 원주민의 조화로움을 이루는 맞춤 처방전이었다. 울퉁불퉁하고 제멋대로인 돌을 오른쪽 왼쪽, 위아래로 돌려가며 부족한 곳과 넘치는 곳을 맞춰 하나하나 돌을 올리는 것처럼 우리들도 그래야 함을 예전 제주민들은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평생 제주에 터를 잡고 산 원주민과 땅도 낯설고 사람도 처음인 이곳에 발을 디딘 이주민들이 하루아침에 살가워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른 속도로 살아온 사람들끼리, 여러 방식으로 걸어온 길들이 하루아침에 눈녹듯 하나가 되거나 없어지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주민들도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괸당 문화'도 한 번쯤 자세히 눈여겨 살펴보고, 마을 공동체에서 하는 일들을 '구식'이라고만 치부하지 말고 이곳 사람들의 정서와 문화를 한 번쯤 헤아려 보는 넉넉함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제주의 자연이 좋아서, 제주의 삶이 여유롭고 단순해서 왔다 하더라도 결국 제주에서 산다는 것은 제주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와 다른 모습으로 삶을 살아간다고 해서, 금방 떠나버릴 것 같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배척하고 외면하는 것은 집주인의 도리가 아니다. 지나가는 손님에게도 물 한 바가지, 밥 한 끼 함께 하는 것이 우리의 정이라면 제주에서 함께 하는 그들 모두에게 열린 마음을 갖고 삶의 뿌리가 잘 뻗어 내릴 수 있도록 함께 하는 것이 제주 원주민의 의무감이라면 의무감 아닐까?
이젠 더 이상 제주 사람, 아닌 사람은 없다. 제주에서 살고 있으면 제주 사람인 것이다. 제주를 사랑하고 제주를 아끼면 다 제주 사람이다. 뼛속부터 제주 사람이라면서 제주에 대한 모든 권리가 있다는 것도 어불성설이고 제주에 와서 제주의 못난 점만 들추며 흙탕물을 만들고 떠나버리는 것도 제주인으로서 자격 미달이다.
제주에서의 삶을 기쁘게 생각하는 사람, 제주를 사랑하는 사람, 제주의 자연을 제 집처럼 보호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진정한 제주인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제주 토박이이지만 이제야 제주인이 되어 가고 있음을 느끼는 여전히 이주민 같은 토박이로 느리고 게으르게 제주 사람이 되어 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