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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시나물 Jul 06. 2021

안경 벗고 보는 세상

-때론 안 봐도 되는 것이 있겠지-

 가끔 안경을 벗어던질 때가 쓸 때보다 더 편한 나이가 되고 말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 침대에서 책이라고 읽으려고 하면 안경을 끼고 보는 것보다 안경을 벗고 맨눈으로 책을 보는 편이 훨씬 시원하다. 안경을 꼈는데도 책 글씨가 잘 보이지 않고, 안경에 뭐가 묻어서 그런가 열심히 안경알을 닦아보지만 글의 초점이 맞지 않아 자꾸만 눈을 찌푸리게 된다. 안경 탓이 아닐 텐데 자꾸만 짜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나이 드는 값을 언제까지 치러야 끝이 날는지 쯧쯧 혀만 내두르고 있다. 이런 지경이고 보니, 때론 안경이 거추장스러워 소파 위에서 책을 읽을 땐 한쪽에 안경을 벗어둘 때가 많다. 가끔 친구들 푸념 속엔 독서용 안경과 컴퓨터를 많이 보는 사람들을 위한 사무용 안경까지 있다고 하더니, 나 역시 그 둘을 함께 하는 또 다른 조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고민 중이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안경을 낀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뭔가 지적이고 더 예뻐 보이는 얼굴. 안경이 흘러내릴 때 검지 손가락으로 안경을 치켜올릴 때나 호호 입김 불며 안경알을 닦을 때 슬쩍 훔쳐보았던 그 아이의 두 눈을 볼 때도, 가끔 코를 찡끗하며 잔 주름을 만드는 모습에서도 안경이라는 것은 조금 덜 생겨도, 조금 덜 멋있어도 그것만 있으면 훨씬 근사한 모습으로 탈바꿈시키는 묘한 마법 같은 면이 있었다. 안경 낀 그 애가 책이라도 읽을라치면 왜 그렇게 멋져 보였을까? 왠지 고급스러워 보이고 무슨 까닭인지 부자집 아이처럼 보였던 그때를 돌이켜 보면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그 나이 때는 그랬다. 그래서 안경을 꼈다는 것은 나에게 모범생임과 동시에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임을 간접적으로 표 내는 꼬리표 같은 거였다.

 하지만 내가 안경을 끼고 보니 그건 영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음을 알게 되었다. 안경을 꼈다고 공부가 잘해지거나 내 행동이 바뀌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안경을 끼고 싶어서 시력 검사를 할 때 보이는 것도 안 보이다 했고, 일부러 텔레비전 가까이 가서 보고, 책도 코앞에 바싹 붙여서 봤다. '우리 집엔 눈 나쁜 사람은 없는데'하며 안경을 맞춰주시던 엄마의 말을 들으며 살짝 찔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쓰기 시작한 안경은 은근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비가 오는 날 버스에라도 타면 갑자기 시야가 뿌애져서 안경을 벗고 닦아내야 했는데 만원 버스 안에서 한 손에 우산을, 다른 한 손은 버스 손잡이를 잡은 채 안경을 닦아야 하는 건 외줄 타기 광대의 몸짓처럼 위태위태했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대면서도 앞은 봐야 하니 손잡이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몸을 의지한 채 얼른 닦아내야 하는데 자칫 시간을 놓치거나 차가 급정거를 할 땐 정말 최악이다. 그것뿐일까? 널브러진 채로 텔레비전을 보려 하면 안경 대가 자꾸 신경 쓰여서 일어나 앉거나 안경다리 한쪽을 비스듬히 세워야 한다. 얼굴이 영 편하질 않다. 팔베개라고 하려치면 남편 팔을 안경대가 찔려서 호강 한 번 제대로 해보기 어렵다. 그뿐인가. 선글라스를 끼려고 해도 겸용이 아닌 경우엔 계속 가는 곳마다 안경을 바꿔 껴야 하고, 황신혜처럼 머리 위에 멋들어지게 선글라스 머리띠를 만들려고 해도 영 폼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생각보다 크고 예쁜 내 눈을(?) 렌즈에 한 번 걸려서 보여줘야 하니 그것도 아쉽다면 아쉽다.(사실이다. ㅋㅋ) 이렇게 안경과 한 몸인 채로 사십여 년을 살다 보니 이젠 세수를 할 때도 안경을 끼고 하는 바람에 낭패를 보기도 하고, 가끔은 안경이 어디 있나 한참 헤맬 때도 있다. 이런 지경인데도 여전히 안경은 그 나름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알이 없는 안경테를 착용하고 있는 성시경 같은 연예인들을 봐도 그 효과가 크고 유재석도 안경을 벗고 나면 딴판인 얼굴로 웃음을 줄 정도니까 말이다. 나도 얼굴에 있는 점을 안경테가 묘하게 가려서 점 빼지 않아도 되겠다 위안 삼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며칠 전 안경을 벗은 채 소파에 누워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문득 귀에 낯익은 목소리에 끌려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안경을 쓰지 않아 화면이 뿌옇게 보여서 가수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안경을 쓰려다 문뜩 그냥 그 목소리를 들어 보기로 했다. 고등학교 때 들었던 목소리. 나근나근하고 감미롭게 들었던 그 목소리를 안경을 쓰지 않고 들으니 훨씬 좋았다. 내가 그때로 돌아간 듯 그 가수의 조용하고 나직한 목소리는 지금의 시간을 얼음 시켰다. 노래가 끝나자 반가운 마음에 얼른 안경을 끼고 화면을 봤다. 아뿔사, 보는 게 아니었다. 내가 들었던 목소리와 오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그 가수 얼굴의 간극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었다. 잠시잠깐 예전으로 돌아가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땡' 소리가 났다. 아직도 내 마음은 이불속에서 잠들 때까지 라디오를 들었던 그때로 돌아간 듯 반가웠는데 안경을 끼고 본 현실은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듯 정신을 깨지게 했다. 아, 안경을 끼지 않아서 좋을 때도 있구나!


 안경을 끼지 않아서 세상 흉흉한 소식을 보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경을 끼지 않아서 화낼 일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멋대로의 선입견과 편견의 안경으로 그 사람을 보지 않을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새로울까? 자세히 들여다봐야 좋을 때도 있지만 멀치감치 떨어져서 실루엣 하나 만으로 감동을 받을 때도 있고, 또렷하지 않은 시야라서 읽지 않아도 되는 것, 알아채지 않아서 좋을 것들을 챙기는 것도 나이를 먹어가며 드는 지혜인 듯싶다.


 세수를 하고 안경을 끼지 않으니 내 얼굴의 잡티도 점도 보이지 않고 불빛에 비친 얼굴이 예뻐 보인다. 주름도 보이지 않고, 늘어진 턱살도 감춰줘서 고맙다. 수술이라도 하지 않고선 안경을 쓰지 않고 살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아주 가끔 안경을 쓰지 않은 자유를 느끼고 싶다. 설령 잘 보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세상을 안 보고 안 듣고 살 수는 없지만 안경을 쓰지 않고 봐야 할 순간이라면 과감하게 안경을 벗고 심안으로 세상을 들여다봐도 괜찮을 것 같다. 안경을 벗는다는 것이 회피가 아니고,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앞으로도 안경은 내 얼굴에 초밀착된 상태로 함께 해야 하는 내 피부와도 같은 존재로 남을 것이다. 싫다고 떼어 버릴 수 없고, 안 하고 싶다고 안 쓸 수도 없다. 평생 함께 가야 할 사이기에 이젠 그의 존재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지만 앞으로도 험한 세상을 가는데 안 가도 될 곳은 보지 않게 해 주고, 디뎌야 할 때, 딛지 않아야 할 때, 봐야 할 때, 보지 않아야 할 때를 잘 구별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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