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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시나물 Jun 15. 2020

[남편]너밖에 없다

-건강 검진 후 알게 된 새로운 사실-

 점점 김치를 만들어 줄 분들이 줄어들고 있다. 남편이나 조카들이 찾는 할머니표 김치는 요즈음 여름을 타는  시어머니께서 만든 오이김치와 양념 게장이 대신하고 있다. 일 년에 한 번 얻어먹던 엄마표 김치도 김치 파업을 선언한 덕분에 자취를 감췄고 이젠 너희들이 알아서 김치를 담그라며 사서 먹는 것도 좋을 거라는 충고만 남았다. 하긴 김치를 만들 때 들어가는 양념이랑 수고로움을 생각하자면 정말 사서 먹는 것이 몇 배 더 남는 장사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랬던 내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십 년지기와 마트에 갔다가 배추 세 포기로 김치 만들기에 도전하고 말았다. 배추의 겉껍질을 벗겨내고 어떤 세프의 손동작을 따라 하며 소금으로 절이고 멸치, 다시마, 양파, 디포리 등이 들어간 육수를 만들어 양념장을 만든 후 부추와 배추에 버무렸더니 얼추 김치 흉내를 내는 내 인생 첫 김치가 만들어졌다. 그게 무슨 일 축에나 드냐며 별로 힘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안 쓰던 근육이 놀랐는지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저리고 뒷일도 너무 많았다. 그래도 생애 첫 김치를 담갔으니 조촐한 기념 파티를 하고 싶었다. 수육을 삶고 막걸리를 사고 새우젓을 섞은 양념장도 만들었다. 그리고 두 부부가 즐겁게 잔을 기울였다.

 술은 사람을 솔직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잔을 기울일수록 결혼 생활 20년 만에 듣는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됐다. 결혼 전 남편은 친구에게 빌려준 돈을 못 받고 IMF로 삭감된 월급 때문에 결혼할 수 있을까 망설였다고 한다. 그래도 내가 결혼하자고 해서 놀랐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나한테 그런 이야기 전혀 없더니 발음이 조금씩 꼬이고 목소리가 높아지던 남편의 실토는 웃음소리로 거실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비하인드랄 것까지 없었지만 우리도 갈등도 있었고 고비도 있었다는 것을 새삼 기억해 내곤 이십 년 세월이 참 빠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건강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리고 갑자기 며칠 전 울 신랑 건강검진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생전 처음 하는 수면 내시경이라서 긴장을 많이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름 걱정이 되었던지 내시경을 하기까지 인터넷에 올라온 수면 내시경 후일담을 많이 읽었던 모양이다. 후일담에는 헛소리를 했다거나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몰랐다거나 잠든 사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불안하다는 경험담들이 가득했다. 남에게 상처 입히기 싫어하고 신세 지기는 더 싫어하는 남편은 마취가 깰 때 무슨 이야기를 할 지 불안했던 것 같다. 괜한 말 했다가 책 잡힐 것 같고 쓸데없는 말 했다가 뒤가 안 좋을 거라 생각했는지 미리 입단속을 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하긴 예능 프로그램에서 수면 내시경을 했다가 마취에서 깰 때의 모습을 너무 희화하거나 눈물샘을 자극하며 마치 수면 후 진심이 나오는 것처럼 온 국민을 상대로 사기 아닌 사기를 쳤으니 내시경을 처음 하는 뒤가 구린(?) 울 신랑이 걱정할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결국엔 회사 직원들 모두 모여서 수면 내시경에 대한 비상 회의를 했고 경험담을 나눴다니. 할 일도 진~~~ 짜 없다. 아니면 정말 내가 모르는 비밀이 많았었나? 감춰야 할 비자금이라도 있는 걸까? 내가 알지 못하는 재산이라도 따로 챙겨놨다면 정말 기쁠 것 같다. 가시눈을 하고 남편을 째려보는데 뜻밖의 말이 터져 나왔다. 신랑의 상사가 머릿속으로 외우라던 문장. 마치 닫혀 있던 돌문을 열던 알라딘의 주문 같은 문장. 그것은 뜻밖에도 "너 밖에 없다!"였다. 너밖에 없다니. 그건 무슨?? 나 아닌 다른 여자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내 곁에 있어 줄 사람은 나뿐이라는 것인가? 내가 있어줘서 고맙다는 뜻이었을까?

 아마도 머릿속으로 되뇌다 보면 눈을 떴을 때 이 문장이 저절로 입 밖으로 처음 나올 것이라는 얄팍한 계산이 있는 다분히 의도적인  말. '너밖에 없다.' 얼굴이 벌게진 남편은 실제 이 문장을 몇 번 연습했다는 어이없는 이야기를 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술술 자백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라는 그림책 속 비보가 자신의 소원을 꿈꾸기 위해 매일 밤 거울을 보며 최면을 걸었지만 결국 자신의 반려견 마르셀의 꿈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비보는 신비한 무화과의 비밀을 알고 나서 잠자기 전 자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지중해에 궁전 같은 집과 보트와 멋진 사냥개와 산책하는 허황된 꿈을 말이다. 우리 신랑도 수면에서 깨어났을 때 무의식의 힘을 빌어 이벤트를 할 요량이었지만 그것은 한낱 신기루에 불과했다.

아쉽게도 울 신랑은 간호사가 "**님, 일어나세요"하니까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이제 시작할 거냐고 물었다. 끝났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지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내 손에 이끌려 옷을 갈아있고 그냥 나왔다. 그리고 자기가 무슨 말하지 않았냐며, 진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냐며 묻고 또 묻고 솔직히 말해달라고 귀찮게 굴었는데 지금 보니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 남편의 상사가 전화 왔을 때도 난 농담으로 '딴 여자 이름 말했으면 벌써 이혼했습니다'라고 넘겼는데 이런 협동 작전이 있었는 줄 정말 까맣게 몰랐었다. 

 울 신랑을 불안하게 만든 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진실을 찾으려는 집요한 탐정처럼 계속 추궁에 추궁을 거듭했지만 그 외에 별다른 소득은 아쉽게도 없었다. 그나저나 조금 아쉬운 면도 있다. 이런 꿍꿍이를 모르고 남편이 눈을 떴을 때 날 보고 '너밖에 없어'라고 했다면 그래도 쑥스러우면서도 감동적이지 않았을까?

 내년엔 내가 수면 내시경을 받아야 한다. 난 어떤 문장을 준비해야 할까? 내가 눈을 떴을 때 제일 처음 만나는 사람이 내 남편일 테니 어떤 말로 최면이 끝났을 때 나의 진심을 은근슬쩍 무임승차시킬지 고민해야겠다. 어수룩한 남편처럼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닌 약간의 연출이 가미된 나만의 드라마를 만들어 볼 작정이다.

 


그러고 보니 우린 너무도 가슴속에 많은 말을 담고 사는 모양이다. 그것이 부부 관계라 할지라도 말할 수 없는 것도 많고 몰랐으면 하는 비밀도 있고 말하고 싶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말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말도 있다. 부부 사이라 해서 모두 알 필요는 없지만 알아서 상처가 되고 알아서 좋지 않을 거라면 들어도 못 들은 척 알아도 모른 척하는 것도 살아가는데 하나의 지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꼭 전하고 싶은 말이라면 한번쯤 용기를 내는 것도 살아가는 동안 유쾌한 활력소가 되어 줄 것이다.


 말은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을까? 글은 100% 완벽하게 작가의 의도를 표현하고 있을까? 표현해야 안다고 하지만 표현하지 않고도 그 마음을 알고 있기에 한평생을 함께 하고,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가장 원했던 걸 말하지 못해 황혼에야 응어리를 던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때론 뜬구름 잡는 말이라도 한 번쯤 내 귀로 듣고 음미해 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니 더더욱 부부 사이엔 솔직한 말과 감정이 중요한 것 같다.

'난 그런 말 못해', '어떻게 그걸 말로 해?'할 지 모르겠지만 술의 힘을 빌려, 마취의 힘을 빌려 하는 것 보단 백 배 낫다.

 남편의 '너밖에 없다' 해프닝은 흥겨운 술자리의 재미있는 안주거리였지만 그래도 그 마음이 진실이길 바라본다. 술이 깨도 마취에서 깨도 이 세상에 울 신랑에게 나는 항상 '너밖에 없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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