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스물아홉 살 때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비가 잔잔히 오던 날, 할아버지께서 나보다 두 살 적은 남동생과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던 모습. 구부정한 허리에 몸을 채 다 못 펴시고 동생의 우산 밑에서 불안한 듯 다가오는 버스를 힐끗힐끗 바라보던 눈길. 숱이 많은 하얀 눈썹이 굵은 초승달처럼 떠 있고 유난히 푹 패인 볼과 주름살 가득했던 우리 할아버지. 그리고 정차된 버스 안에서 차창을 통해 그 둘을 쳐다보고 있던 나. 누가 할아버지와 나 사이를 알까 봐, 아는 사람이냐고 물어볼까 봐, 네 동생 아니냐고 알아볼까 봐 전전긍긍하며 애써 동생과도 할아버지와도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던 어리석은 나.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그 날, 그 비 오는 날, 할아버지는 그렇게 내 가슴에 지울 수 없는 멍이 되고 말았다.
그때 할아버지는 제주시에서 한 시간 버스를 타야 도착하는 '양잠단지'라는 곳에 혼자 살고 계셨다. 예전부터 누에와 고치를 쳤던 마을이라 이름 붙여진 '양잠단지'. 실제 할아버지 집에서도 누에를 길렀었다. 소낙비라도 내린듯 '솨'하는 소리가 나면 누에가 뽕을 먹고 있구나 생각하면 됐었다. 가구 수도 별로 없고 사람들 간의 왕래도 많지 않았던 그런 곳에서 할아버지는 오롯이 혼자 살았다. 아니, 혼자 사셔야 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아빠가 군대에 가 있었을 때 할머니를 여위셨다. 버스를 타고 내리던 할머니의 치맛자락이 낀 채 버스가 출발하는 바람에 할머닌 크게 다치셨다고 한다. 그 사건의 충격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할아버지는 영민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허공을 향해 느닷없이 고함을 지르곤 했다. 때론 하늘을 향해 굽혔던 허리까지 꼿꼿이 세워가며 몇 분씩 그렇게 악다구니를 하셨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간신히 마음을 진정하고 나서도 숨소리가 많이 거칠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우왁스런 독백은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았을뿐더러 대부분 욕이어서 도대체 누구를 향한 발악인지 우리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끊임없이 쉰 목소리로 계속해서 뭔가를 토해 내기만 하셨다. 마치 당신의 아픔과 슬픔을 상대로 혼자만의 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때론 처절하기까지 했다. 분명 치매는 아니셨는데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런 때만 아니라면 평상시 할아버지는 너무 조용하셨다. 편안한 얼굴로 밭에서 김을 맸고, 담배를 마셨고, 음식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또 갑자기 뭔가에 홀리듯 그렇게 한순간에 변하시곤 했던 것이다. 어린 우리는 그런 할아버지가 창피했다. 다른 사람들이 말을 걸어도 그 질문에 맞게 대답하지 못하셨고 혼자 뜻 모를 말을 중얼중얼거리기만 하는 할아버지가 이상하기도 했고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엔 그냥 그러려니, 처음부터 그게 할아버지였다는 듯 우리는 아무 신경도 쓰기 않았다. 그래도 할아버지와 대화가 되는 건 우리 엄마였다. 시집온 후 매일 할아버지를 만나러 버스를 타고 와서 만 평 가까이 되는 밭일을 함께 하고 같이 점심을 먹고 지냈던 것은 며느리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 엄마가 효부라서 둘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었다. 마당에 있던 나무를 아무 이유 없이 자르는 할아버지를 우악스럽게 말리는 것도 우리 엄마였고, 당신의 행동에 반대하는 것에 화가 난 할아버지는 소리소리를 지르며 도끼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태어날 때부터 곱슬머리였던 동생을 보고 어느 날은 지지빠이(딸) 같다고 남동생의 머리를 바리깡(?)으로 밀어 놔서 어린 동자승을 만들어 논 것도 할아버지였다. 밭일 갔다 온 사이 까까머리가 된 아들을 본 엄마는 말문이 막혔는지 별말씀이 없으셨다. 할아버지와 싸우다 싸우다 잠깐 눈물을 훔치는 엄마를 몇 번 본 것도 같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빠는 할아버지와 엄마가 싸우는 모습이 마치 격없는 아버지와 딸의 다툼 같았다고 회상하곤 했다.
그런 우리 할아버지는 식성도 특이했다. 할아버지께서 가장 사랑했던 것은 아마 '설탕'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정말 설탕을 좋아하셨다. 큰 국 대접에 커피를 듬뿍 넣고 설탕을 밥 숟가락으로 두 번 세 번 넣어 드시거나 토마토를 먹을 때도 빨간색 토마토 위엔 하얀 설탕 눈이 담뿍 내렸다. 개역(미숫가루)에도 설탕을 그야말로 쏟아부으셨는데 기운이 좀 없다 싶으면 설탕과 물의 비율이 거의 같은 설탕물을 만들어 후루룩 잡수시곤 했다. 지켜만 봐도 너무 달 것 같아 인상을 찡그리는 우리와는 달리 할아버진 산해진미를 먹은 듯 흐뭇한 표정이셨다. 그리고 여름이 되면 자주 찾으시던 음식이 바로 '쉰다리'였다. 어린 내가 보기에 가장 이상타 여겨졌던 음식 '쉰다리'. 지금은 그것이 전통 발효 음료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큰 양은 낭푼에 소여물 같이 걸쭉하고 밥알이 둥둥 떠있는 모양새가 너무 보기 싫었다. 거기다 보글보글 거품까지 일었을 때는 마치 오랜 시간 방치된 김치찌개처럼 먹어서는 안 될 상한 음식 같기도 했다. 배가 아플까 걱정이었는데도 할아버지는 낭푼에 코를 박고 그릇 채 퍼 드셨다. 가끔 설탕 대신 당원을 넣어 저어 드시기도 했는데 너무도 맛나게 드셔서 할아버지 얼굴만 쳐다보고 있으면 할아버진 나에게도 그릇 한쪽을 내미셨다. 먹음직스럽지도 않았고 뭔가 시큼한 냄새에다가 죽도 아니고 음료수도 아닌 희여 멀건 한 그 음식은 정말 내 타입이 아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먹방에 이미 발동해버린 호기심은 조심스레 그릇에 입을 갖다 대게 만들었다. 그리고 눈 질끈 감고 '쉰다리' 한 모금을 꿀꺽 삼켰다. 걸쭉하게 목을 통과하는 맛이 단 것도 아니고 시큼하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뒷맛은 깔끔하고 속이 확 쓸려내려 가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한 모금 더 먹어는데 시원하고 달콤한 그 맛은 정말 예상외였다. 할아버지처럼 쉰다리를 즐긴 것은 아니지만 할아버지가 쉰다리를 만들어 드실 때마다 밥그릇으로 한 번씩 얻어먹었던 기억이 있다.
쉰다리는 무더운 여름에 밥이 쉬었거나 쉬려 하는 밥을 가지고 만든다. 일부러 밥을 쉬게 만들기도 했는데 밥을 조물조물 거려 물을 넣고 나중에 누룩을 넣어 만들었다. 누룩은 마치 돌처럼 딱딱했는데 밥 안에 넣기 위해 잘게 부수고 골고루 섞은 다음 물을 넣어 따뜻한 곳에 놔두면 막걸리 같은 향과 맛이 난다. 시원한 여름에 갈증을 날려주었던 제주도 전통 음료로 지금의 요구르트처럼 장에 좋고 유산균이 많아 소화가 잘 되게 도와주던 음식이었다. 우리 할아버지식 '쉰다리'는 비교적 덜 발효되었을 때 먹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보다 조금 텁텁한 맛이 나기도 했다. 여름철 밭일에 힘이 들거나 땀이 많이 났을 때 집에 돌아와 한 번씩 들이키는 '쉰다리'야 말로 할아버지의 여름 나기 음식이었다. 지금은 수제 요플레를 만들거나 시중에 파는 요구르트를 먹으면 되지만 어떻게 쉰 밥을 이용해서 이런 음식을 만들 생각을 했는지 그 지혜에 감탄 또 감탄 중이다.
할아버지는 닭도 잘 잡으셨다. 부엌에서 솥 하나에 가득 물을 끓이고 그곳에 닭을 넣은 다음 깃털 하나하나를 손수 다 뽑아 백숙을 만들곤 했다. 가끔 닭 안에서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아직은 달걀이 아니지만 달걀이 되려고 하는 것 한 두 개를 발견하여 겉껍질을 벗기고 먹곤 했는데 그 노른자의 맛이 또 기가 막혔다. 그리고 또 가끔은 몰래 왕사탕을 숨겨뒀다가 똘망똘망 쳐다보는 손주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누런 종이에 사탕을 싸서 망치로 부숴 먹었던 기억도 새롭다. 잘게 부서진 사탕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는 그 맛은 또 얼마나 일품이던지.
지금 할아버지는 이 세상엔 안 계시다. 돌아가실 때도 당신의 성격대로 누구 하나 힘들게 하지 않고 며칠 앓아누우셨다가 조용히 가셨다. 할아버지의 숨소리가 잦아들 즈음 엄마는 분주히 집안을 오가셨다. 우리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얼떨떨하게 할아버지를 보냈다. 입을 벌린 채 깊이 단잠을 자던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할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할아버지와 서로 속 마음을 시원하게 터 놓고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순 없었지만 할아버지께선 가끔 내 손바닥을 들여다보시다가 '우리 손녀는 손재주로 먹엉 살켜(먹고 살겠구나)'하셨다. 손재주라곤 전혀 없었던 나는 할아버지의 말에 피하고 웃고 말았지만 그래도 할아버진 우리 오누이를 많이 아끼셨던 것 같다.
할아버지를 묻어 드리고 돌아오던 날, 유독 쓸쓸해 보였던 아버지의 목소리엔 그래도 잘 지켜드렸다는 안도감이 들어 있었다. 우리 아빠가 '양잠단지'를 고향 삼아 25년 넘게 버티신 이유는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당신이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야 하고, 드시고 싶을 때 드셔야 하고, 하늘을 향해 땅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해소할 곳이 필요했다. 가끔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웬 거지 같은 할아버지가 사신다고. 그 아들이 공무원이란 말엔 더 한심한 집안이라고, 어떻게 이런 산중에 할아버지를 혼자 두냐며 불효 막심한 사람들이라고 욕을 했다고 한다. 하긴 넝마 같은 옷을 입고 허리띠 대신 넥타이 같은 끈으로 허리를 질끈 동여맨 채 허리를 굽힌 채 땅만 보고 다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오해를 할 만도 했다. 하지만 그 동네 사람들은 왜 할아버지가 그곳에 계셔야 했는지 알고 있었고, 결코 우리 부모님이 불효 막심하기만 한 사람들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우리 가족을 많이 도와주셨다. 그런데도 가끔 술을 드신 날이면 아빠는 할아버지를 함께 한 집에서 모시지 못한 것을 힘들어 하셨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시내에 있는 집에 오시는 날은 극히 드물었다.
그 날, 비가 내리던 그 날, 할아버지가 무슨 이유로 제주시에서 하루를 묵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오는 '양잠단지' 가는 버스를 태워드리기 위해 우리 오누이 중 누군가가 할아버지를 버스 정류장까지 모셔가야 했다. 변명하자면 그때 나는 여고생이었고 내가 타야 할 버스는 우리 학교까지 가는 버스였기 때문에 내 친구들이, 많은 남학생들이 탈 시간이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멋진 할아버지였다면 나도 당연히 팔짱을 끼고 할아버지를 모셨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는 누가 봐도 조금 이상한 모습이었다. 난 아침부터 울고불고 난리를 폈다. 그냥 나 혼자 간다고. 그 버스 정류장에 학교 가는 버스와 '양잠단지' 가는 버스가 10분 간격으로 올 텐데, 내가 당연히 모셔야 하는 것이 누가 봐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난 정말 창피했다. 나를 얼래고 달래고 설득하던 부모님도 결국 남동생의 등을 밀었고 동생은 할아버지 팔을 부축하여 버스 정류장까지 모셔왔던 것이다. 만약 그때 할아버지가 나를 못난 손녀라고 혼을 내셨다면 지금 마음이 편안했을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 앞에서 그리 떼를 쓰며 짜증을 낼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께서 그때 내 행동을 이해하셨을까? 쉰이 다 된 지금, 할아버지께서 그때를 모르고 가셨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한다. 그리고 정말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다.
'쉰다리'가 제 몸을 삭혀서 그 맛을 내는 것처럼 할아버지도 그리 평탄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닌 듯싶다. 사고로 할머니와 이별하고 한때는 '암산왕'이었던 학창시절과는 완전 딴판인 길을 걸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시큼하지만 속을 단숨에 훑어 내려가는 '쉰다리'의 상쾌함처럼 할아버지만의 세상에서 누구보다 자유롭게 마음대로 살다 가셨다. 누군가에게 간섭도 받지 않았고 넓은 밭을 무대로 시간도 할 일도 당신이 정했다. 그리고 걸쭉하지만 소화가 잘 되게 도와주는 '쉰다리'처럼 할아버지는 어렵고 바쁘게 살아가던 우리 가족에게 세상에 존재하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편안히 기댈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되어 주셨다.
다시 여름이 시작된다. 그리고 한번쯤 비라도 내리는 날이 되면 나는 어쩌면 '할아버지'를 떠올릴 것이고, '할아버지'를 떠올리고 나면 자연스레 '쉰다리'가 기억의 바닥에서 때론 아프게 때론 그리움으로 끌려 올려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