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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시나물 May 22. 2020

[부모님]소나무 이사하던 날

 소나무가 이사를  했다. 이십 오 년 전 공무원을 퇴직하신 아버지는 과수원 일에 힘을 다 하셨다. 아들이 피자 가게를 하니 고구마도 심어야하고 오이피클을 만들어야하니 오이도 가꿔야하고 무도 밭 한 켠에 자리를 잡았다. 과수원의 주인공인 귤 농사에도 정말 열심이었다. 도청에 출근하듯 아침에 과수원으로 출근했고 네 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와 남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갑자기 심장이 안 좋아진 아버지는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병원 가기 얼마 전 틈틈이 키우고 배우던 소나무 분재 약 이 백 그루를 모두 처분해 버렸다. 당신이 없으면 이 소나무들에게 물을 누가 주냐며 단칼에 미련을 라버렸다. 난  아깝다고 말렸지만 아버지는 병원 생활이 길어지거나 병원에서 못 나오면 아들 딸에게 짐이 될까봐 걱정을 많이 하신 모양이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췌장의 혹이 위치가 안 좋고 모양이 안 좋다하니 갑자기 옷과 가방 정리를 하셨다. 안 입은 옷은 모두 버리고 며느리가 사준 가방은 며느리에게 돌려주고 잘 쓰라고 했다한다. 당신은 들고 다닐 데도 없다며. 앞으로도 간혹 이런 부모님의 유언을 여러번 들어야 할 것 같은데. 동생은 하늘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갈 생각 마시고 돈이랑 통장이랑 어디에 있는지 얘기하고 가시라했다. 동생의 말에 모두들 '빵' 터져서 웃고 말았는데 몇 년 째 우리 가족은 이렇게 주기적으로 유언 아닌 유언을 때론 엄마에게서 가끔 아버지에게서 듣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 어느날 뜬금없이 소나무 화분이 있던 곳을 다육이가 다시 자리를 틀었다. 소나무의 빈자리가 허전하고 썰렁타 느껴졌는지 아니면 건강이 조금 회복되었다 싶은지 갑자기 삼 십 만원을 주고 다육이를 구해오셨다. 옆집 삼촌(제주도에서는 가까운 이웃 사촌을 삼촌이라 한다)이 얼마 전부터 다육이 키우기에 열중이더니 우리 집에 다육이 바이러스가 번진 것이다. 그렇게 다육이에 정을 붙일만도 한데 아버지는 소나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사실 우리 아버지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에 인색했다. 너무도 어렵게 자랐기 때문에 어울릴 시간도 없었고 오누이만은 당신의 설움을 물려줄 수 없다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로 삶을 버텨내셨다. 그래서일까?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셨고 혼자만의 판단과  끈기로 가족들을 이끌어 오셨다. 그래서 어쩌면 외로웠겠지만 어쩌면 가장 실속있는 자기만의 세상에서 당신의 계획과 미래를 차곡 차곡 쌓아오신 것이다. 퇴직을 하시면서 하고 싶었던 일 중에 첫 번째는 춤이었고, 그 다음이 서예와 주역 공부였고 일흔 다섯쯤 부터 수지침과 분재 수업을 다니기 시작했다. 열성적인 학생이었던 아버지 덕에 과수원 집엔 어린 소나무들이 하나 둘 늘기 시작했고, 내 눈엔 별반 달라보이지 않는 모양인데도 아버진 화가라도 되는듯 소나무가 보여줄 미래를 꿈꾸셨다. 태풍 주의보가 있으면 화분을 일일이 집 안으로 옮기셨고, 송이를 사 온다, 영양흙을 사온다 온 정성을 기울이셨다. 그래서 벽난로 옆은 항상 아버지의 작업 흔적이 남겨져 있었다. 그런데도 쿨하게 미련 없이 떠나 보내길래  아쉬움이 없을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러다 지난 주 남편이 마장(승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남편 친구들의 놀이터-난 그 곳에 투자한 게 후회 막급이다. 저들만의 놀이터라니)에 어린 소나무가 많다고, 가서 뽑아올 수 있다며 아버지의 기대에 불을 지폈다. 잠깐 아버지의 얼굴에서 기대감과 의구심을 동시에 봤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부모님을 모시고 마장엘 갔다. 깨끗하고 파란 하늘은 코로나로 뒤숭숭한 세상을 잊게 했다. 그리고 마장 .한귀퉁이에서 드디어 소나무를 마주했다. 도도하게 하늘로 뻗어 있는 자태는 오랜 세월을 견뎌온 그네들만의 자화상이었다. 하지만 소나무들은 우리를 환영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세상일은 내 알 바 아니니 그저 볼 일만 끝내라는 듯 고고하기 짝이없었다. 그래도 언제 새끼를 쳤는지 솔방울이 떨어져 새로운 생명이 움텄다 생각하니 너무 신기했다. 그리고 과수원에 새로 입주할 소나무 수색이 시작되었다. 초록 잔비밭 사이에 간간히 '나 소나무예요'라는 것들이 눈에 띄였다. 아직 소나무라고 하기엔 잎만 뽀족할 뿐 과연 이게 저 큰 어미 소나무가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게 했지만 우리들은 제주 고사리 찾듯 보물찾기 하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몇 천 번 절해야 한 자루 가득 고사리를 딸 수 있다고 했던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소나무는 그 곁을 쉽게 내주지 않았다.  어차피 뽑힐 거지만 제 손으로 가지 안겠다 고집을 부렸다. 거기다 온통 주위가 잔디밭이었기 때문인지 소나무 뽑기는 난관 그 자체였다. 믿었던 골갱이(제주에서는 '호미'를 '골갱이'라고 부른다)도 소용없었다. 땅을 파보려 했지만 비가 오지 않은 흙은 너무 단단했고 조밀하게 얽혀있는 잔디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남편은 그냥 손으로 뽑으면 된다며 대책없이 소나무와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뿌리가 상해서 안 된다느니, 삽을 가져오라느니, 비오면 다시 와야겠느니 하며 한창 실랑이를 하다가 기어이 남편의 고집으로 소나무 뽑기가 시작되었다. 힘으로 안 되던 차에 부모님도 한 발 물러서는 모양새다. 그렇게 스무 그루 남짓 뽑고 다시 과수원으로 돌아왔다.  

골갱이로 소나무 캐기가 너무 힘들다
결혼 52년 팀웍이 보여준 소나무 심기의 명장면~~

과수원에 오자마자 아버지는 정 가위로 소나무를 다듬으셨고 어머니는 빨간 고무 대야에 물을 받아 소나무를 담그셨다. 그리고 바로 소나무를 새 집으로 입주시키기 시작했다. 그곳엔 이미 깻잎 식구들과 삼엽초가 자리를 하고 있었고 소나무는 바로 그 옆에 터를 분양받았다. 아버지는 삽으로 땅을 파내고 엄마는 소나무 뿌리를 잘 펴서 흙을 덮은 다음 골갱이 등으로 흙을 다져 넣으셨다. 그리고 손으로 꾹꾹 눌러주셨다. 지켜보자니  늦은 오후  햇볕 아래 짜증이 일기 시작했다. 빨리 들어가서 쉬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의 손길은 쉬 멈추지 않았고 다리가 아파 땅에 주저앉아 일을 하면서도 소나무 하나하나 꼭 살려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문득 엄마의 일바지에 항상 엉덩이 부분만 흙이 묻어 있어 그동안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무릎이 아프고 다리를 뻗지 못해 여지껏 이렇게 농사일을 하셨던 모양이다. 그렇게 흙밭이 엄마에겐 편안한 방이었고 일터였으니 이미 우리 부모님은 몇 년 전부터  재택근무를 하고 계셨던 셈이다. 가끔 아버지는 힘에 부치셨는지 삽을 내게 넘기셨다. 쉽게 보였기 때문에 삽 위로 발을 갖다대고 있는 힘껏 눌렀지만 삽은 땅 속으로 들어가 주지 않았다. 몇 번 똑같은 발길질을 해야 겨우 구멍이 생겼다. 분명 아버지보다 내가 더 젊은데도 아버지의 삽질을 따라갈 수 없었다. 시간은 그냥 지나는게 아닌가 보다. 젊음을 앗아가지만  요령을 터득하게 하고 막무가네 힘대신 기술을 선물했다. 아버지의 지휘 아래 겨우 한 삽을 뜨고 다른 곳에 다시 땅을 파려고 하는데 아버지는 그곳이 아니라며 오른쪽 아니, 아니 조금더 쪽하며 딴 곳을 가리키셨다. 뒤를 돌아보니 소나무 정착시키기에도 나름 규칙이 있었다. 하기싫은 삽질에 왜 꼭 줄을 맞춰야 하는지 자유롭게 심으면 안되냐 했더니 처음엔 대답을 찾지 못하다가 그래야 관리하기 쉽다는 어정쩡한(?) 답을 주셨다. 아버지도 왜 그런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을 듯하다. 그냥 그렇게 하다 보니 그래야 하는거 아니었을까?  난 그런 아버지의 근성은 공무원에서 기인한 것 아닌가 했는데......피식 웃음이 났다. 하지만 저 고지식한 답답함과 우직함이 지금의 아버지임을 어쩌랴. 그래도 이제는 조금 삐뚤어지면 어떠랴 조금 못 하면 어쩌랴 했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아버지는 한 치의 벗어남도 용서하지 않으신다.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소나무 이사하기 작전'은 무사히 끝이 났다.

엄마의 뒤로 갓 입학한 신입생들이 "참색 짹짹"하며 뒤따르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저 소나무들처럼 항상 바쁜 엄마의 등을 보며 자란 것 같은데 이젠 그 등이 너무 작고 힘이 없어보여 안쓰럽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이면 과수원에 밭일 하러 가시고 늦게 집에 돌아오셔서는 미뤄뒀던 집안일 하셔야 하고 어린 오누이를 돌봐야했다. 엄마의 인생 절반이 그렇게 농사와 함께 자식과 함께 지나가고 말았다. 아버지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오늘도 일은 아버지가 시작하고 그 일의 절반 이상을 아니, 거의 모든 일은 엄마의 몫이  버렸다. 아버지는 엄마의 불평을 모른 척하며 일을 벌이고 엄마는 화를 내면서도 뒷처리를 감당하신다. 지금도 과수원에서 살고 싶다는 아버지와 제주시에서 살고 싶다는 엄마는 끊임없이 토닥대면서도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하신다.  따로 원하는 대로 살면 어쩌겠냐 했더니 그럴거라 큰소리 치다가도 하르방을 어떻게 혼자 두냐며 도돌이표를 찍으신다. 아마 이런 두 분의 끈끈함이 별다른 말 없이도 소나무 이사를 수월하게 끝내게 하는 비결인 모양이다.

부모와 예기치 않은 작별을 한 소나무들이 지금쯤 새로운 집에서 자리를 잘 잡았나 모르겠다. 이사한 집에서의 첫 밤은 원래 설레기도 하고 지난 집이 그립기도 하고 그럴텐데. 낯선 곳에서 떨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빨리 단비가 내려서 우리 과수원에 잘 자리를 잡고 다시 아버지의 손길로 멋지게 자랐으면 좋겠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우리 오누이가 아버지의 사랑을 먹고 자랐듯 그 빈자리를 이 어린 소나무들이 대신 채워줬으면 좋겠다. 항상 곁에서 말벗이 되어주고 쳐다봐주고 보람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아마 아버지에게 이 소나무들이 한동안은 아들이고 딸이 되어 줄 것이다. 소나무에게 일방적으로 내 짐을 옮기는 것 같은 미안함도 있지만 언제나 그 푸르른 그 성정으로 우리 부모님 곁에서 뿌리를 잘 내려주길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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