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기 싫은 곳 중의 하나는 동사무소(지금은 주민자치센터)와 같은 관공서와 은행이다. 그리고 카드사나 보험 상담전화를 받거나 컴퓨터에 관한 문의를 해야 할 때 정말 난감하다. 도무지 서류라는 녀석은 나에게 까만 건 글씨요, 하얀 건 여백이고, 잘 알지도 못하는 용어는 귀로 들어와 머리를 뒤죽박죽 만들어 혼을 쏙 빼놓고 약정이니 대출 한도니 무슨 무슨 서비스니하는 단어들이 그냥 고속도로를 스치듯 내 머리를 관통한다. 요즘은 퇴직금이나 실업급여, 연금이니 하는 단어들이 내 주위를 서성이고 있지만 애써 모른 척하고 있다. 그 모든 것들과 친하지 않아도 그냥 난 잘 살 수 있을 건만 같아서.
밥순이와 밥돌이로 시작된 선생님들 모임의 단골 얘깃거리는 단연 학교나 학생들 얘기다. 오늘은 우리 반 누구가 이랬어요 저랬어요. 아~ 그렇구나 하는 추임새는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며 어느새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흥겹곤 했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부턴 마지막 주제는 주식 이야기다. '기승전'은 우리들 네 명 모두의 관심 분야였다가 '결'은 오늘의 주식 시세에 대한 화제로 마지막 불을 놓는다. 세 분이 주식을 하는데 고수인 한 분과 고수 근접인 한 분과 이제 입문하여 발 빠르게 고수를 향해 가는 한 분 곁에 주식엔 먹통인 나 이렇게 모여있다. 처음부터 주식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시류를 따르다 보니 아니, 주제의 끝이 사방팔방으로 달리다 보니 주식 이야기까지 번졌던 건데 세 분의 공통 관심사가 요즘 주식이었다. 십여 년이 넘게 꾸준히 주식을 해 온 이야기며 급등한 주식으로 짭짤한 재미를 봤다는 솔깃 솔깃한 이야기는 나에게 정말 신세계였다. 대출금 갚고 저축하고 땅 사고, 집 사고 이것만이 경제의 능사라 여기며 다른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었는데 내 주변 지인들은 이렇게 각자의 방법으로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발휘하여 차곡차곡 자신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씩 휴대폰으로 빨갛게 파랗게 그려진 그래프를 보여주며 팔렸다, 샀다 하는 얘기로 오늘 커피값은 누구가 내고, 위로의 눈길은 누구에게 보내며 이러저러 주식판에서 벌어지는 무용담에 꿀꺽 침을 삼키는 건 나였다. 주식 용어도 나에겐 블랙홀이었다. 매도니 매수니 종가니 사실 나는 개장시간이 언젠지도 모르는 주린이 중에 주린이지만 모르고 덤빈다고 은근 도전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해 볼까?"
나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말렸다. 밥돌이 선생님도 주식은 시간과 집중이 필요한데 이래 저래 다른 곳에 관심이 많은 나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말렸다. 그리고 주식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해야 한다는 조언도 덧붙이셨다. 하지만 주식에 재미있어하는 동료들을 보며 나도 끼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보이자 그럼 일단 백만 원으로 주식의 흐름을 공부해 보라 권하셨다. 그래, 나도 해 보는 거야!
대학 동창 만난 자리에서 주식 얘기를 했더니 지금 휴대폰에 앱을 깔아보자며 다운로드를 하고 순서에 따라 차곡차곡 들어갔는데 마지막 관문에서 직원과 화상 통화를 해야 한다 해서 그 자리에서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그 뒤로도 몇 번 화상통화를 다시 시도했으나 전 상담원이 통화 중이라 연결이 안 된다는 대답뿐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문자로 계좌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이 왔는데 그게 뭔지 나도 잘 모르고 그냥 스쳐 지나쳐 버렸다. 내가 계속 주식, 주식 입에 달고 사니 남편이 그럼 은행 가서 만들어 보자고 쉬는 날 집을 나섰다. 나는 남편에게 주식 용어나 은행 용어는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같이 상담원을 만나 보자고 남편에게 제의했다. 그런데 남편은 다섯 살 어린애들도 혼자 만드는 세상에 무슨 소리 나며 펄쩍 뛰는 거다. 그 모습에 빈정 상한 내가 그럼 안 간다고 무작정 떼를 쓰니까 같이 가준다 마지못해 약속을 했는데 남편은 주차하는 곳이 없다는 핑계로 그냥 밖에서 들어오지 않았다.
은행엘 온 게 정말 오래간만이다. 마스크를 쓰고 의자에 듬성듬성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왠지 긴장이 됐다. 주식 때문에 왔다 하면 한심하게 보지 않을까? 많은 돈도 아닌데 좀 창피하기도 하고 물어보는데 대답을 못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콩닥콩닥 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됐다. 예쁘고 친절해 보이는 은행원이 나를 맞았다. 무슨 일로 왔냐는 물음에 입출금 되는 통장을 만들러 왔다고 했다. (남편이 그렇게 말하면 된다 해서). 근데 어떤 용도로 쓸 것인지 다시 묻는 거였다.
"생활비도 넣고 주식도 좀 할까 해서요"
은행원이 슬며시 웃는 거 같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인 것은 내 눈에만 보였던 것일까? 그러면서 주식은 주식거래 통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라고 요즘 너무 많은 분들이 만들어 달라고 해서 그냥 그렇게 만들어 주고 있다며 어느 증권 회사와 거래할 것인지를 물었다. 내가 아는 데는 딱 한 군데! 친구들이 말해준 곳 하나밖에 없어서 K라고 대답했더니 그럼 그 회사와 계좌를 연결해 주겠다는 거다. 얼떨결에 "네,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싸인을 몇 번 했는지 모르겠다. 사인을 할 때마다 은행원의 친절한 설명이 있었지만 난 반은 알아듣고 반은 무슨 말인지 잘 몰라 허둥댔다. 내가 모를 때마다 이건 이래서 그렇게 하는 거라고. 은행원들도 참 힘들겠다. 하루에도 똑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해야 하니 말이다. 한참을 둘이 합작하며 계좌 만들기의 끝을 달리는 순간, 갑자기 은행원이 "망했다!"라며 나를 쳐다봤다. 왜냐고 묻는 내 눈빛이 처량해 보였는지 이미 이번 달에 K에 계좌가 하나 만들어져 있어서 지금은 만들 수 없다는 거다. 그 문자! 제대로 확인 안 한 그 문자가 눈 앞을 쓱 지나갔다. 그러면서 한 달이 지나야 새로운 계좌를 만들 수 있다며 K에 전화를 해서 계좌를 취소하고 다음 달 24일이 후에 다시 오면 만들 수 있다며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미 기록으로 남겨 있으니 그때 다시 와서 만들면 된다는 착잡한 위로도 함께 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잘 몰라 당황하는데 계좌를 만들 수도 없다 하니 얼굴이 벌게지며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왔다. 얼굴뿐만 아니라 마음도 이미 빨갛게 달아올라서 함께 와 주지 않은 남편에게로 모든 원망이 쏟아졌다. 마치 길을 잃었다가 엄마를 만났을 때 우왁 하고 모든 감정이 폭발하는 것처럼. 차에 타자마다 내려오지 않는 옥타브 목소리로 왁왁대는 나에게 남편은 남편대로 잘 모르겠으면 천천히 물어보면 되지 그것 하나 못 끝냈냐고 화를 얹었고, 나는 그러니까 당신이 옆에 있었으면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지 않냐고 되받아쳤다. 차 밖으로 하얀 눈이 나폴 나폴 내리는 겨울의 한 낮이었지만 차 안에선 날 선 부부의 목소리만 사납게 뒤엉켰다. 에휴, 이런 남편을 믿고 내가 어떻게 살 건지.
사실 고백하자면 우리 남편도 은행원인데 가끔씩 사이비(?) 은행원 같다. 신혼 때 공과금 고지서를 주며 납부 좀 해 달라고 하면 사무실에서 우리 집 일을 어떻게 보냐며 직접 가서 해결하라 하고, 대출 때문에 은행엘 가면 마치 모르는 손님을 대하는 것처럼 자기 앞 의자에 앉으라 하고, 근무 중이지만 잠깐만 나올 수 있냐고 하면 그 은행 일은 혼자 보는지 한 시간 나왔다가 들어가면 천지가 개벽하는 줄 안다. 그래도 부인의 일은 좀 은근슬쩍해줄 수도 있는 거지 어떻게 이런 상황을 만드냐는 게 나의 일방적인 생각인 것이다. 한참을 둘이서 차 안에서 씩씩대다가 우리는~~ 우리는 그렇게 국숫집엘 갔다. 차 안에서의 난타전은 조금 사그라들었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배고픈 건 해결해야 한다는 신념은 둘이 통했으니까. 금방 삶아서 나온 오늘의 비빔국수가 나름 달콤 새콤해서 이혼하는 건 한 번 미루기로 했다. 남편은 국수가 고마워야 할 거다.
주식이 뭔지, 하긴 내가 주식으로 돈을 벌면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주식으로 돈을 벌거다. 24일이 지난 후 나의 첫 계좌가 만들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주식이 과열인 지금 은행 갔다 이혼할 뻔한 부부는 우리 뿐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