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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시나물 Mar 04. 2021

막무가내 우리 아빠

-30년 전 대학 입시 보던 날-

 학교에 낼 서류를 챙기다가 문득 이력서에 붙일 사진이 떠올랐다. 그냥 스캔한 것도 괜찮겠지 뭐 하다가도 혹시나 해서 예전에 찍어 두었던 증명사진을 찾느라 이 서랍 저 서랍을 뒤졌지만 사진이 나오질 않는다. 분명 어딘가에 잘 놔뒀을 텐데 이젠 그 어디가가 어딘지 기억이 어슴푸레하다. 결국 시간이 다 돼서 찾는 걸 포기하고 다른 일정으로 눈을 돌리려는 순간, 날카로운 가시에 찔리듯 그렇게 까많게 잊고 있었던 그날이 떠올랐다.

 삼십 년 전 대학 입시를 보던 날, 그날의 아찔했던 기억.

새벽부터 엄마는 보온 도시락에 밥과 국을 쌌다. 첫딸의 대입을 겪어야 했던 엄마도 입시날은 처음인지라 긴장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도움이 될지, 딸의 대학 시험 점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할 텐데. 방법을 모르는 보이지 않는 엄마의 마음도 우왕좌왕 속이 시끄러웠을 것이다. 혼자 가도 되겠냐는 말을 들으면서도 버스 타고 대학 종점까지 가는 일정이 뭐가 큰일이라고, 혼자 간다 걱정하지 말라 자신 있게 말했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는 것을 그땐 몰랐었다.

 미처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 나는 학교에 등교하는 기분으로 가방을 들쳐 메고 보온 도시락 한 손엘 들고 씩씩하게 시험 장소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이른 새벽인데도 버스 정류장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묘하게 긴장감 흐르는 새벽 공기 속엔 부모님과 함께한 수험생들이 조용히 웅성거리고 있었다. 손을 잡아주는 엄마, 등을 토닥여 주는 아빠,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 그 많은 학생들 틈에 부모 없이 혼자 혈혈단신 버스를 타는 건 나 혼자인 듯싶었다. 그냥 시험을 보러 가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극성이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잠시 잠깐 의연함으로 포장된 나의 자만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의자에 앉아 창문을 보려는데 생각지 못했던 그 무언가가 스멀스멀 밀려오다가 갑자기 한꺼번에 가슴 밑에서 폭발했다. 코끝이 매워지기 시작하더니 알 수 없는 심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다. 괜한 치기였을까?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자신하던 나도 시험을 보러 가는 그 길에 뭔가 의지하고 싶은 것 하나쯤 있었나 보다. 내가 오지 말라고 했으니 부모님이 따라오지 않은 것뿐인데도 괜히 서운하고 서글픈 마음이 의연하려던 내 마음을 앞지르던 그 날, 난 버스 안 외톨이이자 바람만 휑하니 지나가는 무인도였다.


 고사장 앞엔 학교 후배들이 자기 학교 선배들을 응원하는 목소리로 장사진을 쳤다. 고래고래 소리 질러가며 지나가는 수험생들에게 박수를 치거나 따뜻한 차와 떡을 줬던 거 같은데, 사람 길을 만들어 놓니 그 사이를 지나가기가 너무 민망했다. "파이팅"이라는 소리가 메아리치는 듯했다. 응원도 경쟁이었던지 각 학교 후배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자기 학교 선배들을 찾아 격려해주는 무슨 통과의례였던 거 같다. 수험표에 적힌 고사장을 찾아 들어가 내 자리를 찾았다. 수험표를 꺼내고 공부했던 책들을 책상 위에 놓고 한 페이지를 넘기려는 순간, 누군가가 주민등록증이나 학생증이 있어야 한다는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민등록증?', '학생증?' 순간, 눈 앞이 하얘졌다. 수험표와 필기도구를 챙겨 왔을 뿐, 나도 내 신분을 증명할 학생증이나 주민등록증이 없었던 거였다.(이 부분 기억이 희미하다. 둘 중 하나는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수험표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했던 내 생각이 짧았던 모양이었다.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 뭔가에 홀리듯 그렇게 나는 한 번 와 보지도 않은 대학 건물 공중전화를 찾아 집으로 전화를 돌렸다. 번호 하나하나 누르는 손이 떨리고 심장이 뛰었다. 전화를 받는 아빠의 목소리를 듣자 그만 참았던 눈물이 볼멘 목소리가 되어 터져 나왔다. 아빠에게 사정을 전했다. 울음 섞인 딸의 목소리에 출근 준비를 하던 아빠도 많이 놀랬을 터였다. 하지만 아빠는 침착하셨다. 자신이 가져다줄 테니 걱정 말고 교실에 앉아 있으라고. 꼭 가져가겠다고. 아빠의 목소리에 조금 진정이 된 나는 그래도 불안했는지 대학 건물을 빠져나와 교문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와 계실 테니 뭐라도 물어봐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님께 우리 아빠가 오실 테니 부탁도 드려야 할 것 같았다. 한참을 걸어 내려와 교문에서 선생님을 만났을 때, 선생님은 그거 없어도 되니 수험표 잘 챙기고 빨리 올라가라고 손을 흔드셨다. 없어도 되냐고 몇 번이나 확인했던 거 같다. 선생님 말씀을 듣고 다시 걸음을 옮겨 고사장으로 들어갔다. 아빠를 잊어버린 체. 조금 당황은 했지만 안도감은 의외로 나를 쉽게 진정시켰던 거 같다. 그렇게 나의 길고 길었던, 어쩌면 시험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불안했던 나의 시간은 어둑어둑해져서야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와 방엘 들어갔는데 내 책상은 무슨 전쟁이라도 난 듯 엉망이었다. 서랍이란 서랍은 다 열려있고, 물건들은 제자리를 찾으면 큰일 난다는 듯 이리저리 뒤엉켜 있었다. 온갖 잡동사니가 책상 위를 의자 아래를 떠 다녔고, 책이란 책은 모두 책꽂이를 탈출해 있었다. 멍하니 책상을 보고 있는데 퇴근하신 아빠가 들어오셨다. 시험 잘 봤냐고 웃으시며 들어오는 아빠의 얼굴이 상기돼 있었다.

 "우리 딸 덕분에 경찰 오토바이를 다 타봤다" 아빠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내뱉었지만 아빠가 오토바이를 타다니, 그것도 경찰 오토바이를 탔다는 말에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아빠는 오늘 아침 당신의 막무가내 직진 행보를 펼쳐 놓셨다. 내 전화를 받은 아빠는 몇 십분 책상을 뒤지고 뒤져 결국 학생증과 주민등록증을 찾아서 집을 나섰다고 한다. 택시를 타려고 해도 잡히지 않고, 버스는 이미 만원이고 어떻게든 딸을 만나야 하는데 방법은 지나가는 경찰밖에 없더란다. 그래서 경찰 오토바이를 세워 사정을 했더니 흔쾌히 30분이 넘는 거리를 경찰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대학교 정문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정문에서 학교 선생님을 만나 자초지종을 들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대학교에 근무하는 지인 찬스로 이리저리 학교를 찾아 헤매셨다는 거다. 우리는 베이비붐 세대였다. 그 많은 학생 중에서 찾을 수도 없지만 오래 머물 수도 없었기에 아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리셨다는 거다. 잘 보고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말이다.

 벌써 삼십 년 전의 일이니, 그때라서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그때의 무용담은 두고두고 우리 가족의 재미있는 이야기 감이었다. 바람을 가르며 경찰 뒤에 매달린 아빠의 모습을 생각하면 짠하기도 하지만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다. 아빠라서, 부모라서 가능했던 것일까? 자식에 대한 사랑이 앞을 가려 눈 앞에 뵈는 것이 없었던 것일까? 더 어려서는 집에서 한 시간 버스를 타고 가야 했던 과수원을 가는 길이었는데 그때 마침 버스 기사들이 파업 중이었다. 그래서 운전기사는 우리 보고 끝까지 갈 수 없고, 아랫마을에서 내려야 한다는 말을 전했다. 안 그러면 갈 수 없다는 거였다. 의외로 쉽게 알겠다는 아빠의 대답에 나는 과수원까지 걸어서 가야 하느냐고 뾰로통해져 있었다. 버스 안에 우리 식구뿐이었고 그때 엄마는 이미 과수원에 있어서 토요일이라 아빠와 오누이가 함께 가는 길이었는데 그만 일이 공교롭게도 꼬여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아랫마을에서 아빠는 우리 손을 잡고 끝까지 내리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 운전기사와 한참을 실랑이하셨다. 도민들을 위한 일이 이런 거냐고 아빠는 맨 앞자리에서 기사 아저씨와 언성을 높이셨다. 아빠의 큰 목소리에 난 싸움이 날 거 같아 무서웠는데 결국 버스 기사는 우릴 목적지에 내려 줬다. 한 번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뜻을 굽히지 않는 아빠, 나의 아버지. 하지만 그랬던 아빠도 시댁에 나를 두고 와야 하던 날은 집에서 목이 쉬도록 우셨다고 한다. 외삼촌이 내 결혼식 다음날 전화를 했다가 잘못 전화한 줄 알았다며 두고두고 말씀하셨다. 한복을 입은 나는 아빠를 배웅하고 들어오다가 왈칵 울음이 터졌는데 아빠는 웃으며 이젠 어른이라고 잘 살라고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가셨는데 집에선 혼자 그렇게 눈물을 흘리셨던 모양이다. 티코를 첫 차로 운전을 하는 딸이 걱정돼서 몇 번이고 전화로 확인하고 확인하고. 술 드시고 전화하셔서 사랑한다고 고백할 줄도 아는 우리 아빠. 그렇게 강직하고 큰 산이었던 아버지의 허리가 조금씩 굽혀 들어가고 몸이 왜소해지고 발걸음도 많이 힘겨워지시는 걸 보며 지나온 시간들에 잠식되어 가는 아빠의 젊음이 안타깝기만 한 오늘, 서류에 붙일 사진 한 장은 이렇게 아빠의 사랑을 가라앉아 있던 기억 속에서 건져 올리게 만들었다.

 여전히 목소리만 큰 우리 아빠, 나의 아버지. 정치와 역사 이야기만 나오면 전쟁을 모르고 어려움을 모르는 너희 세대들이 나라를 망친다고 나무라시면 같이 목소리를 높이다 그 자리를 빠져나오려고 아등바등 대고, 아빠의 고집에 못 말려~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하는 나지만 그래도 막무가내 아빠의 든든한 사랑은 어릴 때나 쉰이 넘은 지금이나 여전히 내 주위를 든든한 울타리로 둘러싸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이 아빠의 사랑방식이고 내가 사랑을 받는 방법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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