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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시나물 Jun 22. 2020

여행에 이유가 꼭 필요할까?​

-'여행의 이유'를 읽고-

 여행을 좋아한다. 아니,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간혹 내가 진짜 여행을 하는 이유가 뭘까 하고 고민이 되는 순간들이 있다. 일상생활에서의 탈출 같은 뻔한 답이 아니라 뭔가 나도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질 수 있는 수긍되는 대답이 필요했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 '나 이렇게 살아요' 자랑질하기 위해 여행을 하나? 아님 하루라도 젊은 날 사진이라도 많이 남겨 두고 싶어서 그런가? 아니면 새로운 곳을 한 번 가보자는 호기심 때문인가?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데도 가지 않으면 허무해서 그런가? 나는 그렇게 매년 아무런 생각 없이 2월 수업이 없을 때와 휴가철이 되면 20년 지기 언니와 훌쩍 비행기를 타곤 했었다. 꼭 이유를 찾지 않아도 어디론가 훌쩍 길을 나선다는 것 자체가 그저 좋기만 했다.     


 여행은 하는 것보단 가기 전이 더 설렌다고 했던가? 정말 그랬다. 별 이유 없이 여행을 떠난다 해도 한 학기 동안 진땀 나게 일을 하고 바삐 생활하다가 어디를 갈 것인지 고민하고 검색하고 의논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즐겁고 행복하기만 했다. 어디로 갈까?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고 찾아보기를 몇 번 하다 보면 이러 저런 이유로 여행지가 결정된다. 그리고 가는 곳이 정해지면 코스를 짜고 맛집을 찾고 반드시 거쳐야 할 핫플레이스를 검색 또 검색하며 나름의 계획을 잡는다. 다른 이들의 블로그나 카페에서 그 여행지의 정보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준비물들을 챙기는 재미도 쏠쏠했다. 처음엔 짐이 너무 많았다. 평상시 집에선 쓰지도 않던 것들을 여행지에서 필요하다고 잠옷까지 챙기니 짐 옆에 짐이요, 짐 위에 짐이었다. 그런데 몇 번 짐을 꾸리다 보니 요즘은 가능한 한 멀티 제품을 이용하려 하고 돌아올 때 가방에 다시 담고 오지 않아도 되는 것들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 간의 여행 패턴도 조금 달라졌다. 예전엔 여행사에 모든 것을 맡기고 한 번에 많은 곳을 가고 가격도 싼 것만 찾아다녔다. 그래서 여행은 항상 바빴고 붐볐고 정해진 시간을 지켜야 했다. 이렇게 패키지여행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매력이었지만 쇼핑몰을 꼭 들려야 하는 코스는 좀 불편했다. 경비를 싸게 하려니 그런 선택지 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관심 없는 물건에 대해 설명을 들어야 하고 안 사면 가이드에게도 주인에게도 괜히 미안해지는 상황이 견디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꼭 빚진 것 모냥 마음에 부담이 생겼다. 그래서 그다음은 돈이 좀 나가더라도 노쇼핑을 택해서 여행 상품을 골랐고 그다음은 개인 활동이 보장되는 것을 골랐다. 아마 다음번엔 스스로 계획을 하고 경험을 할 수 있는 자유 여행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바쁘고 복잡한 여행이 아니라 편안하고 여유 있는 여행을 하게 될 것임을 기대한다. 이런저런 여행에 대한 고민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도 귀를 기울이게 됐고 내가 모르던 꿀팁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 여겨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던 터에 '여행의 이유'를 만나게 되었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 속에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학창 시절부터 여행을 많이 했다는 그는 여행이 독자가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고 싶어 하는 것처럼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다시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기 위한 기회라고 말하고 있다. '일상으로의 여행을 위한 여행'이라는 말이 신선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을 여행이라 생각하고 모든 일에 여유를 갖고 어려운 일은 추억으로 삼고 시간에 쫓겨 뭔가를 놓쳐도 대포 크게 한 번 웃어넘길 수 있는 그런 여행의 마음을 갖고 있다면 내가 살아가는 이 시간도 재미없다, 살기 싫다, 왜 사냐는 질문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일상으로의 복귀를 위한 여행이자 새로운 여행을 준비하는 여행이야말로 영화를 보기 전 예고편과 같은 호기심을 갖게 하고 사람을 진취적으로 만들 것이다. 


"여행은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에서도 소설과 닮았다. 설렘과 흥분 속에서 낯선 세계로 들어가고, 그 세계를 천천히 알아가다가, 원래 출발했던 지점으로 안전하게 돌아온다."    


 작가의 말처럼 여행의 시작 꾸러미 안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설렘과 흥분이 담뿍 담겨 있다. 이야기의 시간과 공간이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이 사건을 기대하고 어떤 주인공을 만나게 될지 설레는 마음을 갖는 것을 여행에서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의 역경과 모험이 차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낯선 언어의 거리와 이색적인 풍경은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손님으로서의 예의 같은 것이고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갈 때는 본래의 제 자리를 찾아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출발할 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여행을 끝낸 여행자의 모습이 뭔가가 달라져 있음을 사람들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행자는 연어처럼 자신의 출발지이자 도착지에서 가장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여행의 이유'에서 작가는 여행지에서의 여행자의 모습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그는 현명한 여행자의 태도로 오디세우스같이 노바디로 움직이길 권한다. 오디세우스가 험난한 여행을 통해 변화를 겪었듯 허영과 자만을 경계하고 타자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갖길 충고하는 것이다. 

많은 경험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행지에서 한국의 음식만 고집하거나 타지이니 다른 사람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듯 행동하거나 스트레스 푼다며 예의를 잊어버리는 경우를 보며 안타까웠던 적이 있다. 내 것을 잠깐도 포기하지 못하고 자기 것만 고집한다면 다른 세계를 받아 드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또한 여행을 하면서 얻게 되는 새로운 모험이나 도전을 맛 볼 기회조차 뺏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나 미래로 여행을 간 영화 속 주인공들이 그 시대에 섞이지 않고 최대한 관찰자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듯 여행지에서 의미 있는 노바디로 있으라는 작가의 말엔 전적으로 동감이다.  

   

"허영과 자만은 여행자의 적이다. 달라진 정체성에 적응하라, 자기를 낮추고 노바디가 될 때 위험을 피하고 온전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어려운 책이 아니어서 여행 수필을 읽어가는 기분으로 술술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분명한 나만의 여행 이유를 찾을 순 없었다. 그저 나에게 여행이란 여전히 일상에서 잠시 쉬어가는 쉼표이거나 갑갑한 일상에서의 탈출이거나 다시 일상을 살기 위한 활력소인 채로 남아있다. 하지만 지금도 '여행'이 좋고 '여행'을 갈망하며 또 다른 '여행'을 꿈꾸는 것은 '여행'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힘이라 믿는다. 그래서 난 스스로 인정하기로 했다. 이유가 없는 여행이면 어떠랴. 이유가 없이 떠나도 행복하면 됐고 이유 없이 비행기를 타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 된다면 그것도 내 삶을 즐기는 방법이라고.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여행을 떠나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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