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님 맛 좀 본 장사 입문기-
동생의 부탁으로 올케와 'ALL 바른 농부장'엘 가 보았다. 동생은 피자 가게를 하면서 '밀'을 또 다른 꿈으로 꾸고 있었다. '제주 밀'을 농사짓고, 수확해서 제분기로 밀가루를 만들어 빵을 만들고, 연구회를 조직하고. 큰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제주 밀'을 보존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동생의 빅피처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곁에서 도울 수 있는 것도 나에겐 다소 위안이 됐다. 오누이란 그런 것이다. 외롭다면 외롭게 자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형제가 하나라는 거. 지금이야 외아들 외딸이 너무도 많지만 우리 때에 오누이는 가뭄에 콩 나듯 희귀했다. 그래서 둘이서 놀고, 둘이서 부모님을 기다리고 둘이서 싸웠더랬는데. 이제는 각자 가정을 갖고 바쁜 생활을 하다 보니 편히 전화 한 번 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그러니 이번 기회는 동생이나 나나 전화 한번 더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줄 터였다. 너무도 바쁜 동생을 보며 가끔은 자기 장사에나 집중을 했으면 좋겠는데 우쿨렐레 강습, 밀농사, 장사, 마을문고회 등 여기저기 반장일을 도맡아 하고 있고 과수원 농사까지 하고 있으니 언젠가 봤던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는 홍반장'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더구나 나는 이제껏 아이들과 만나 수다 떨고 수업하는 일뿐이었는데 갑자기 발등에 떨어진 프리마켓 '빵장사'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못할 거 없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재미있을 것 같은 호기심이 나를 동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주일에 한 번씩 네 시간 동안 장터에 나가 보기로 했다.
첫 번째 장터는 표선에서 열린 'ALL 바른 농부장'이었다. 올바른 먹거리를 지향하고 로컬 푸드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하는 농부들의 모임이자 나눔의 장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정직하게 농사짓는 당당한 농업인으로서의 자긍심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정보를 교환하고 '장'과 '문화'가 공존하는 그런 장터를 꾸려가고 있었다. 뭔가를 사고 파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동안 못 만났던 친구를 만나는 느낌, 정겨운 이웃 사촌들의 모임 같았다. 우리도 올케가 아침부터 구운 통밀 베이글과 통밀이 들어간 식빵, 통밀, 통밀 밀가루 등을 한 아름 들고 갔다. 표선으로 가는 한 시간 동안 기대 반, 걱정 반이었는데 장사엔 잼뱅인 나와, 공무원 생활만 몸에 익은 올케가 과연 손님들을 어떻게 맞이할까도 큰 문제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장터엔 장사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자유롭고 바쁜 분위기 속에서도 농부들은 각자 자신의 가게를 준비하고 정성스레 손님들을 맞을 기대감으로 한껏 달아올랐다. 여기저기서 인사하는 소리, 안부를 묻는 소리,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 등 한순간에 장터는 흥겨움과 웃음소리로 왁자지껄했다. 초보 장사꾼인 올케와 나는 우왕좌왕 어디에 자판을 펼쳐야 할지 어리둥절, 무엇 먼저 시작해야 할지 쭈뼛쭈뼛, 분위기에 젖어들지 못하고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좌불안석, 동분서주였다. 평소에 사교성이 있다는 말을 듣던 나였는데도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런 복잡함 속에서 우리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멀리서부터 여러 가게를 돌아보는 손님들이 드디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름 시식코너도 마련하고 물건값도 익히고 예쁘게 탁자를 꾸미고. 여행을 가기 전 가방을 쌀 때의 느낌이 이럴까? 그렇게 이곳에 익숙한 손님들과 이곳이 낯선 우리들의 장터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어서 오세요, 한 번 드셔 보세요"란 말도 어색하고, 손님들의 질문에 올케의 말을 귀동냥해가며 손님들을 맞이했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빵을 한 번 먹어본 손님들은 다행히도 건강한 맛이라며 담백한 빵의 풍미를 좋아했다. 손님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쿵쾅쿵쾅 가슴이 요동을 치고 그냥 돌아설 것인지 바구니 안으로 들어갈 것이지 기대감으로 얼굴이 상기되는 듯했다. 빵이 한 봉지 팔리고, 통밀이 한 봉지 팔리고, 베이글이 팔리더니 금세 빵은 동이 나기 시작했다. 물건 하나가 팔릴 때마다 재밌기도 하고, 신이 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앗싸'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릴까 봐 조심했다. 마스크를 끼고 있어서 손님들과 가까이하지는 못했지만 농부들의 노력을 알아주고, 제대로 된 값을 받는 시장의 매력은 기름이었던 내 마음 한 귀퉁이가 물로 젖어드는 것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뭔가 뿌듯한 쾌감이 느껴졌다. 큰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내가 벌어들이는 지폐 한 장은 단순히 숫자로 환산할 것이 아니었다.
내가 손님이었을 때 나는 그리 질문이 많은 편이 아니다. 날짜를 보고, 만든 곳을 살펴보고, 적정한 가격을 보고 물건을 사는 편인데 이곳 손님들은 정말 질문이 많았다. 제주 어디서 생산하고 있느냐, 밀의 종류가 뭐냐, 요리 방법이 뭐냐, 보관은 어느 정도 가능하냐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당황도 했지만 자신의 먹거리에 대한 깐깐한 손님들은 이 장을 책임지고 있는 농부들과 정말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무례하거나 갑질이거나 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신뢰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여기저기서 회원들이 자기 생산물을 나누고 먹어보라고 들고 온다. 빵에 발라먹는 된장 잼이 도는가 하면 따끈따끈 초당 옥수수가 날아오고, 수박이 배달되고, 시원한 음료가 들이닥치고. 여기저기서 내민 것들을 맛보느라 배고플 겨를이 없다. 그리고 장터가 파할 즘엔 남은 농산물들을 나눠주고 맛보라며 권해주기도했다. 아직도 서툴고 그 자리가 남의 옷을 입은 듯 하지만, 또 매번 시장에 출석부를 찍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내가 삶을 배우고 새로움을 경험하는 나의 놀이터로, 일하면서 노는 쉼터가 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있다.
나는 그곳에서 받은 아르바이트비로 기꺼이 다시 소비자가 된다. 그리고 장이 끝났을 땐 잼과 다육이와 빵이 양손 묵직하게(?) 들려 있었다. 일을 마치고 가족들을 생각하며 무거워진 양손에 흐뭇해하던 그 옛날 가장처럼 나 역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피곤하지만 즐겁고 노곤하지만 배시시 즐거움이 스민다.
대규모 큰 장은 아니지만 그곳에 가면 동료가 있고 그곳에 가면 생산자와 소비자의 반가운 만남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의 소통 공간이 되어 주는 한 어느 곳에서도 혼자 농사짓느라 힘들기만 한다거나, 외면받는 정책으로 괴로워만 하는 이들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불과 10여 명의 손님 맛을 찔끔 느꼈는데도 벌써 나는 큰 상인이 된 것처럼 다음 장은 이렇게 해 볼까 저렇게 팔아볼까 궁리 중이다. 낚시의 손맛을 잊지 못하는 꾼들이 바다를 찾듯 나도 손님의 웃음과 반가움의 맛을 알아채 버려서 앞으로의 내 도전은 쭈~~~욱 계속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