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겨울, 나에게 '귤'은-
'째깍째깍'
대부분은 두 번씩 가위질을 한다. 한 번 가위질로 일 년 내 품었을 나무에서 노란 귤을 떼어내주고 두 번째는 모난 꼭지를 마무리한다. 그래야 저희들끼리 부딪혀서 상처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얀 꽃을 피우고, 잎보다 더 진한 초록 과실이었다가 과수원 전체가 노란색으로 옷을 입기 시작하면 늦가을부터 시작된 분주함은 눈이 내리기 전까지 그 가위질을 멈추지 않는다. 나무 한 그루에 둘이 매달려 '째깍째깍 탁(바구니에 던지는 소리)' 거리다 보면 빨간 바구니가 금세 노란 귤로 넘쳐난다. 빨간 바구니 안에 황금빛 노란 귤의 조화로움은 따뜻하면서도 상큼한 향을 풍긴다. 바구니 몇 개가 배가 불러갈 즈음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아빠가 그 빨간 바구니를 통째로 다시 노란 컨테이너 박스에 쏟아 넣는다. 와르르 와르르 귤이 컨테이너 안으로 쏟아진다. 수확의 겨울이 와르르 와르르 쏟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작은 미니 경운기 안에 컨테이너가 가득 차면 아빠는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표정으로 창고로 방향을 돌리신다. 창고 안 높이 높이 쌓아 올려지는 귤만큼 농부의 뿌듯 뿌듯함이 켜켜이 쌓이리라. 귤을 딸 때만큼은 그 귤이 얼마인지가 농부에게 중요하지 않다. 알뜰살뜰 매달려 그득그득 수확하는 기쁨이 우선이고, 노란색이 그러데이션 되면서 다시 초록으로 바뀌어 갈 때가 가장 흐뭇하다. 일 년 농사를 마무리하고 다시 새로운 한 해를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과수원을 한 것은 아니라서 귤을 본격적으로 딴 것은 작년이었다. 아니 결혼을 한 그 첫 해에 시어머님이 귤을 딴다고 해서 수업이 끝나자마자 반찬 두어 가지를 하고 과수원엘 간 적이 있었다. 못하는 솜씨 부려 콩나물 무침하고 착한 며느리라 칭찬받을 생각에 걸음을 재촉했던 거였는데 어머님께서 웃으시며 다시 반찬에 양념을 하셨다. MSG도 조금 넣으시고 국 간도 다시 맞추고. 옛 어른들이 먹을 땐 조미료도 써야 한다고 하시며 과수원에 가서는 우리 며느리가 해 왔다고 동네 어른들께 슬쩍 자랑을 얹히셨었다. 몇 시간 한 것은 아니었는데 바쁘면 안 와도 된다고. 이 일은 내 일이니 네 일이나 잘하면 된다며 고생했다 말씀하셨던 시어머니. 난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어리석은 며느리였다. 아니, 고백하자면 마음속으로 '감사합니다' 쾌재를 불렀었다. 원래가 부지런 떠는 성격도 아니고, 밭일도 해 본 적이 없는데 결혼을 하니 시댁이 어렵기도 하고, 도와드려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갔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조금 후회하지 않으실까?) 거기다 그 과수원은 어머님의 홈그라운드였다. 동네 어르신 두 분 정도 같이 귤을 땄던 거 같은데 '째깍째깍' 거리는 소리에 맞춰 온갖 동네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간혹 '아이고~'하는 탄식이 나오고 '깔깔깔' 웃음이 터지기도 하고, 이것도 그것도 아니면 라디오에서 흥겨운 트로트가 나오기도 했다. 결혼 첫 해, 그렇게 감귤 과수원으로의 데뷔는 시원치 않았다. 한 서너 번 갔다가 내 일 바쁘다는 핑계로 유야무야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년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시댁은 '밭떼기(상인에게 밭에 대한 전권을 다 주는 것, 주인이 따거나 할 필요가 없는)'로 귤을 팔았는데 친정은 동생네가 맡아서 하기로 한 첫 해였고 수확량이 그리 많지 않아 반 강제적으로 휴일마다 엄마의 협박과 잔소리로 과수원 과업에 반 강제적으로 투입되었다.
귤을 따려면 제주도의 매서운 바람을 막는 것이 급선무다. 제주 하면 모두들 따뜻한 하와이 같은 휴양지를 상상하지만 사계절 내내 부는 바람은 성가시기 그지없다. 특히 겨울바람은 영상인 기온이 무색할 만큼 차갑고 날이 선다. 게다가 사방이 탁 트인 과수원이니 바람을 막아줄 이는 없으므로 모자도 얼굴을 양쪽에서 완전히 가려주는 것을 쓰는데 마치 옛날 '초원의 집'이라는 드라마의 딸들이 썼던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밭은 춥다며 내 옷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은 엄마의 연속 공격에 나는 내가 입고 온 트레이닝 바지 위에 또 일바지(일명 몸빼)를 입고, 목이 긴 장화를 신고 하얀 목장갑을 껴야 과수원 귤 따기에 입성할 수 있었다. 영 폼이 나지 않지만 과수원 일일 일꾼으로의 구색을 갖추고서야 과수원 안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헉! 추운 겨울 따뜻한 집에서 까먹을 때 내가 알았던 새콤달콤 귤이 아니었다. 넓은 밭 가득 나무 하나에 치렁치렁 옹기종기 야물딱지게 달려있는 귤들이 왜 그렇게 징글징글하게 느껴지는지. 따도 따도 끝이 나지 않는 귤들의 향연은 질색팔색일 정도였다. 거기다 왜 그렇게 잔가지가 많은지 밑에 있는 귤을 따려면 몸을 숙으리고 내려가야 하고 높은 곳의 귤을 따려면 까치발을 서야 했다. 나무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따오는 숙모와 엄마와는 달리 내 키에 맞는 중간 부분부터 따고 힘들면 옆 나무로 이동한다고 한 마디씩 잔소리를 듣었는데 그렇게 따다간 다른 데선 싸움도 난다며 '간세(게으름의 제주어) 부리지 말고 따라'는 핀잔을 이미 여러 번 들었다.
몇십 년을 과수원에서 일을 했던 엄마와 숙모의 파트너십은 훨씬 젊은 나와 올케는 따라갈래야 따라갈 수 없는 속도를 냈다. 가위 질 두 번에 한 번 귤을 넣을 때, 엄마와 숙모는 네다섯 번의 가위질을 하고 나서야 바구니에 귤을 던져 넣으셨다. 귤을 따는 데는 체력보다 경험이고, 젊음보다는 기술이었던 것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뜨끈한 무가 섞인 콩 비지국에 반찬 두서너 가지로 한 끼를 해결하고, 뜨끈뜨끈한 난로가에 앉아 커피 한 잔과 과수원에서의 후일담을 나누는 수다는 밭일의 피곤함을 한 방에 날려주는 피로 회복제였다. 더구나 우리 과수원 퇴근은 세 시였다. 보통 과수원에선 아침 일찍 시작해서 다섯 시가 지나야 끝이 나는데 우리 집은 세 시가 되면 수지침을 놔야 하는 아빠 때문에 모든 식구들이 일을 끝마쳐야 했다. 오히려 함께 했던 외숙모께서 좀 더 따다가 가도 된다며 주인을 나무랄 정도로 직원들 복지(?)가 좋았다. 그래서 아빠는 우스갯소리로 시작하고 뒤돌아서니 끝났다고 이런 일꾼들한테 얼마를 줘야 하냐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의 귤 따기는 끝이 났고, 내가 딴 귤들을 동생은 인터넷으로 팔고 남은 것은 주스로 만들어 소비했다.
마지막 귤을 다 따고 아빠는 흰 편지 봉투에 내 이름을 쓰고 오만 원 권 여섯 장을 넣어 주셨다. 농사일로 벌어본 나의 첫 수입이다. 뿌듯했다. 사실 하기 싫다고 내 일도 바쁘다고 어깃장을 놓긴 했지만 부모님과 흙을 밟으며 옛이야기 꽃을 피우는 게 싫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다. 그저 매년 겨울 내내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이렇게 과수원에서 지지고 볶는 시간이 계속될 줄로 알았다.
올해는 아직 본격적인 귤 따기가 시작되지는 않았다. 올케가 혼자 과수원을 맡겨 주라고 독립선언을 했다는데 과수원을 보는 엄마 아빠는 애가 타는 모양이다. 저 익은 귤을 빨리 따고 끝내야 할 텐데 동생 부부는 나름의 계획으로 설득하며 이젠 쉬시라 걱정 마시라 하고 있는 중이다. 더구나 작년 두 분 모두 편찮으셨으니 무리하지 말라며 토닥거리는 중이다. 그 사이에 나는 가끔 주말에 과수원에 들러 난로에 고구마를 굽고, 엄마 아빠와 점심을 먹고, 귤만 한 바구니씩 한 바구니씩 따오는 데 재미를 들렸다. 내가 직접 딴 귤이어서 그런지 싱싱하고 과즙이 꽉 채워진 새콤달콤 맛을 음미 중이다.
제주에서 '귤'은 그 옛날 진상을 위해 고군분투한 제주민들의 억울한 한이 서린 과일이었다가 어느 때는 부농을 꿈꾸게 하는 희망의 열매이기도 했다가 지금은 처치 곤란의 애물단지가 되어가고 있는 아픈 손가락이다. 하지만 나에게 귤은 제주의 흔하디 흔한 겨울의 한 모습이기도 하지만 그 겨울 속 따뜻했던 추억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두레박 같은 것이며 농사는 짓지 않고 나눠주는 기쁨만 누리는 얌체 같은 내 마음이며 알알이 터지는 수확의 기쁨이기도 하며 몇 년 후 직접 도전할 지도 모르는 나의 미래이기도 하고 늦은 겨울 밤 한 번에 몇 개씩 털어놓은 달콤한 야참 거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