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산 제주 토박이의 제주도 이야기-
제주도는 넓다. 지역을 언어권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같은 단어를 두고도 사는 곳에 따라 '제주어'가 다양하다. 서귀포와 제주시로 나뉘겠지만 동쪽 마을과 서쪽 마을이 '제주어'가 조금씩 같은 듯 다르다. '쥐'를 이야기할 때도 '중이', '쥉이', '쥐', '쥥이'라고 한다. 대학교에 가서 서귀포 친구들을 만났는데 끝 어미를 '언', '인'이라고 해서 재미있어했던 기억이 있다. '친구 인(있어), 전화 언(없어)' '제주어'가 축약의 언어이긴 하지만 반 백 년을 제주에서 살았는데도 '제주어'를 다 알지 못한다. 난 시엣 아이라서.(제주시에 사는 아이라서)
제주도는 또 넓다. 갑자기 생겨난 카페와 박물관과 음식점이 너무도 많고, 구석구석 책방과 커피숍이 넘쳐난다. 그리고 360개가 넘는 오름부터 한라산, 폭포 등 볼거리 즐길거리 먹을거리가 지천이다. 특히 요즘은 거기서 거기겠지 했다가 지인들이 여기 아냐고 물어오는 곳 태반이 전혀 들어본 적도 가 본 적도 없는 곳이 많다. 점점 다양해지는 카페와 식당과 음식이 나에게 제주도를 더 넓고 낯설게 만드는 것 같다. 우스갯소리로 여행을 온 관광객들이 제주 도민보다 훨씬 정보가 빠르고 다양하다며 오히려 우리가 물어봐야겠다고 웃는다. 이러니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친구들이 예쁜 커피숍 있다고 데려가고, 맛난 음식점을 추천해 준다. 엉겁결에 따라간 제주도 토박이인 내가 이런 곳도 있구나 탄성을 내지르는 이상한 상황이 전개된다. 그리고 네비게이션과 인터넷의 위대함을 느낀다
제주 시내에서 약속을 할 때도 30분 전에만 가면 웬만한 곳은 다 갈 수 있다. (요즘은 차량이 많아져서 교통체증이 장난이 아니다. 그래서 약속 시간보다 일찍 출발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지긴 했다) 약속 장소로 손꼽는 곳도 몇 군데 되지 않아서 조금 과장하면 테이블 하나 건너 아는 사람일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아닌 때가 더 많다)
역시 제주도는 좁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 통성명을 하고 나서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만 물어도 친구 둘쯤 건너면 서로 공통적으로 아는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을 통해서 '아, 그때 너였구나'하는 경우도 많다. 같은 학교,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마주쳤음을 알게 된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에 답하면 그 고향에 사는 누구누구를 아느냐는 질문이 쏟아진다. 그러다 보면 사돈에 친척에 선배에 후배에 동창 하다 보면 모두가 아는 사람이 되고 모두가 이웃이 된다. 그래서 제주에 사는 사람들은 같은 마을에만 살아도 혈연 지간이 아닌데도 모두가 '삼촌'이다. 그러니 제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대하고 다투면 낭패를 볼 때가 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비밀을 갖기가 힘들었다. 첩보전을 펼쳤다 해도 저녁이면 누구네 아들과 아무개네 딸이 데이트하더라를 부모님들이 모두 아시게 되는 경우도 있다. 나도 집으로 돌아가다가 우리 동생이 여자 친구와 팔짱 끼고 걸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놀렸던 기억이 있다. 이런 지경이고 보니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말하는 제주도 텃세(?)는 좁은 동네에서 친척 아닌 친척으로 사는 간섭의 또다른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결혼을 할 때도 예비 신랑이 어디 사는 아무개라 했더니 엄마 지인 중엔 우리 신랑 삼촌이 있었고 우리 숙모와 어머님께서 젊었을 때 같은 회사에서 함께 근무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신기했던 적이 있다. 이젠 이런 일이 놀랍지도 않다. 그래서 지금도 어른들끼리는 큰일이 있을 때 별 연락을 하지 않더라도 누가 누구에게 연락하면 올 사람은 다 온다.
지금이야 제주도도 많이 달라졌다. 교통이 복잡해지고 타도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생겼다. 어찌 보면 제주가 넓다 좁다 하는 건 나의 기억 속 제주의 삶이 그렇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살아온 제주는 때론 부처님 손바닥 안 같은 좁은 곳이기도 했고, 할 일 많고 갈 곳이 많은 대양 같은 넓은 곳이기도 했다. 지금의 제주 역시 이러저러한 이유로 사람 간의 거리가 멀어지고 복잡해지다 보니 넓어진 면도 있고 좁아진 면도 있다. 더욱이 요즘은 넓고 좁고의 문제보단 생존의 문제에 더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다. 환경문제, 교통문제, 범죄문제 등이 얽혀있어 물리적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질을 생각해야 할 때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박이인 듯 아닌 듯 살고 있는 나는 더이상 제주가 나쁜 일로 입방아에 오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고, 누구가에게 요란한 빈수레가 되지 않길 바라며 이상한 요지경이 되지 않길 바란다. 나에게 제주는 여전히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하고 내 어릴 적 추억이 깃든 넓지만 좁은 곳, 좁지만 넓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주가 어떤 이유로든 더이상 넓어지길 바라지도 더 좁아지길 바라지도 않는다. 제주는 그냥 제주일 때 가장 제주다울 것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