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세상이 되기 전 초록빛이 제주를 감싸기 시작하는 3월 말부터 제주도 여기저기 이제 막 움을 틔우려던 고사리들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새 순을 틔우고 포자를 만들고 새 생명을 퍼뜨리기도 전에 넘어야 할 고비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마치 바다 거북이 알에서 깨어 모래 웅덩이를 헤치고 천적들을 피해 뒤집어지고 미끄러지면서도 본능이 이끄는 대로 바다를 향하듯 제주의 고사리도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면 그 어느 때보다 몸을 낮추고 꼭꼭 숨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설상가상 온 섬 가득 촉촉이 봄비가 대지를 적셔 나무와 풀들이 푸릇푸릇 신선함을 내보일 때가 되면 제주 사람들은 100미터 달기기 경주를 준비하는 선수처럼 '땅'하는 출발음에 제주도의 숲과 들로 보물 찾기를 향해 달린다.
숲을 닮은 넙적한 잎을 만들어 보기도 전에 허리를 똑똑 분지르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바위틈에 몸을 숨겨보기도 하고, 무덤 옆 돌담 틈에 낮은 포복을 해 보기도 하고, 가시덤불의 호위를 받으며 위장막을 쳐보지만 야속한 사람들의 습격은 정말 무자비하고 자비가 없다.
고사리다. 긴 대 하나에 곱슬머리를 이고 있는 자태는 마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아낙들이 머리에 짐을 이고 있는 모습도 같고, 어느 미지의 나라 어린 왕자를 만날 것 같은 날씬한 바오바브 나무를 닮은 거 같기도 하고 몸 전체를 감싸는 솜털은 안개를 머금은 듯 신비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고사리. 땅 위가 안전한가 목을 길게 뻗어 세상이 이렇게 생겼구나 구경해 볼 틈도 없이 고사리는 이 세상과 첫 번째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다시 생명 주머니를 발동시켜 두 번째 세상을 향한 도전을 시작한다. 운이 좋으면 활짝 숲을 피울 것이고, 운이 좋지 않으면 또다시 꺾이는 수모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봄철만 되면 제주 사람들과 고사리 사이의 숨바꼭질은 끝날 줄을 모른다. 술래인 사람들이 이리저리 숲을 헤매고 고사리들은 가능한 잡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술래의 손길을 피하면 천만다행이고 그 손길에 잡히면 죽음이다. 그래서 술래들은 맛나고 여리고 여린 고사리를 꺾으려고 새벽이슬 맞는 것을 개이치 않아한다. 너무 길지도 않고, 너무 머리를 일찍 풀어헤치지도 않은 어린 고사리를 위해 일 년 내내 이 시기를 손꼽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고사리를 꺾으려면 보통 공이 들어가는 게 아니다. 한 번 꺾고 고사리를 담고, 두 번 허리를 숙여 고사리를 꺾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숲을 수색한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삼천 배를 하면 고사리 다섯 근을 허락한다고 쓰기도 했는지 모르겠다. 고사리 보따리가 두둑해지면 두둑해질수록 허리를 굽혀 산을 향해 고개를 몇 천 배 숙여야 하니 그것은 숲의 영역을 침범해서 죄송하다는 것인지, 이런 맛난 고사리를 보여 주셔서 감사하다는 것인지, 공짜로 가져가기가 미안하니 그에 대해 보답을 하는 것인지. 사람들은 허리의 통증도 잊은 채 몇 시간이고 그렇게 고사리와 찾고 숨는 숨바꼭질을 계속 하는 것이다.
그래서 4월에 내리는 비는 '고사리 장마'라고 해서 제주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다. 고사리 장마가 지나고 나면 어제는 없던 곳에 다시 고사리가 나고, 작았던 고사리가 쑥쑥 커주니 '고사리 장마'는 그야말로 고사리꾼들에게 단비가 아닐 수 없다. 비료 한 번 뿌리지 않고 발걸음 한 번 하지 않았지만 자연은 매년 잊지 않고 이렇게 맛있는 고사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아니, 찾아주지 않으니 저절로 크는 걸까?
이 숲 어딘가에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고사리가 있을 것이다~~
제주도의 봄은 이렇게 벚꽃과 유채꽃으로 시작해서 고사리 따기로 절정을 이룬다. 약속이나 한 듯 매년 이맘때만 되면 고사리 찾기를 하는 어른들이 신기하고 궁금해서 왜 그렇게 고사리를 따러 다니시느냐고 힘들지도 않냐고 중국산 북한산 고사리도 마트에만 가면 쉽게 살 수 있는 것을 왜 그렇게 극성스럽게 산을 찾는지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잠도 설치고, 옷도 가시에 긁혀 찢어질 때가 많고, 허리가 아파 매번 파스를 붙이면서도 또다시 내일 새벽이 오면 언제 아팠느냐는 듯 또 고사리 길을 떠나시니 제철 음식이라고만 치부하기엔 뭔가 다른 뜻이 있을 것 같았다. 답은 너무도 간단했다. 너무도 당연히 해야할 숙제처럼 어른들은 한결같이 매년 제사를 지내는데 내 손으로 딴 고사리를 정성스럽게 올려야 마음이 편안하다 하셨다. 아니 다른 야채들은 마트나 시장에서 사시면서 왜 유독 고사리만은 제 손으로 꺾어야 하는지, 그 불합리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면 어른들은 한결같이 지천에 널려있는 고사리를 눈으로 보면서 꺾지 않고 사는 것은 게으른 삶이기도 하지만 조상에 대한 죄스러움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으셨다. 그래서 반찬도 반찬이지만 일 년 제사에 쓸 고사리만큼은 제 손으로 직접 꺾어서 올리고 싶다는 거다. 점점 기후가 안 좋아지고 고사리를 따러 갔다가 진드기에 물리거나 뱀을 만나거나 고사리 따기에만 열중하다가 일행을 놓쳐 길을 잃는 사고도 종종 일어나니 조심하시라 말만 했을 뿐 그런 어른들의 막무가내 정성을 말릴 명분이 나에겐 부족했다.
군대 얘기하면 밤을 새운다더니 고사리에 관한 무용담도 끝이 없다. 어떤 할머니는 고사리를 잔뜩 따고 집에서 고사리를 꺼내다가 보따리 속에 함께 숨어 있던 뱀에 물려 돌아가셨다는 얘기도 있고 고사리를 삶으려고 솥 안에 넣은 고사리 뭉치에서 갈색 뱀이 나와 혼비백산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고사리 따기에도 은근한 신경전이 붙어 한 보따리 잔뜩 딴 삼촌이 고사리를 조금도 나눠주지 않아서 섭섭했다느니 진드기가 붙어서 옷 전체를 전부 버렸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화장실이 없으니 누가 볼새라 깊숙이 들어가 볼일을 보다 일행을 놓쳐서 울며불며 산속을 헤맨 이야기는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할 이야기로 전해지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고사리꾼'에겐 모두 당신들만의 고사리 밭이 있다는 것이다. 직접 경작하진 않았지만 매년 찾는 곳을 계속 가다 보니 올해도 어김없이 고사리가 지천을 이루어 이렇게 봄철 고사리 따지 않고 집에 있으면 몸이 근질거리고 눈에 고사리밭이 아른아른거려서 안 갈 수가 없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이런 고사리밭에 대한 일급비밀은 아무리 친한 이웃이라도 딸 아들에게도 함부로 알려주지 않는 것이 불문율 아닌 불문율이다. 그래서 맛있는 고사리는 특히 가시덤불을 헤치고 들어가야 있다며 일부러 험한 곳을 마다하지 않는 용감한 분들도 많다. 또 고사리엔 '백고사리'와 '흑고사리'가 있는데, 작고 앙증맞은 백고사리와 길고 큰 흑고사리를 두고 백고사리를 따는 사람은 백고사리만 흑고사리를 따는 사람은 흑고사리만을 딴다며 나름 고사리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작년에 시어머니는 고사리를 따러 갔다가 몸이 이상해서 진드기 검사를 하는데만 50만 원이나 들었다며 볼멘소리를 하셨다. 올해부턴 연세도 있으시니 가지 말라 했는데 며느리 눈을 피해 보슬보슬 비가 온 다음 날 이른 새벽에 또 고사리 밭으로 가실지 모르겠다
고사리를 따기 위해선 독특한 복장도 필수다. 오일 시장에 가면 고사리 앞치마와 바지가 있는데 고사리 앞치마는 주머니가 커서 고사리를 따고 바로 담을 수 있다. 옷은 이래저래 험한 곳을 다녀야 하고 가시덤불도 불사해야 하기 때문에 헌 옷을 주로 입긴 하지만 요즘은 진드기 때문에 면 소재가 아니고 미끌미끌한 소재 옷을 더 선호한단다. 그리고 운동화 대신 장화를 신는 게 좋고 모자는 그 옛날 '초원의 집'에서 본 것 같은 얼굴을 모두 감싼 그런 모자를 써야 햇볕으로부터 나무로부터 얼굴을 보호할 수 있다.
이렇게 탈도 많고 말도 많은 고사리를 따고 온 고사리꾼들은 승리한 개선군 같은 걸음으로 자신이 따온 고사리를 마당에 골고루 널어 말리고 생고사리는 독성도 있다 해서 꼭 삶아서 냉동실에 놔두거나 음식을 만든다. 제삿날 통통하고 야무진 고사리 볶음을 먹거나 비빔밥을 만들어 먹을 때 고추장과 함께 비비거나 고사리 육개장을 만들거나 돼지고기와 함께 볶아 먹으면 간장 양념이 벤 고사리의 독특한 맛을 느낄 수 있긴 하다.
고사리는 이렇게 말린다 과랑과랑 좋은 햇볕에~~-사진 by 제주 줌바봉봉
제주 고사리는 다른 지역의 고사리보다 값이 비싸다. 자연산이니 경작한 것보다야 비싸겠지만 제주의 어른들은 고사리 따기를 그냥 일이 아닌 소풍을 가는 것쯤으로 여기시는 것 같다. 물론 고사리를 팔아 넉넉하게 챙긴 용돈은 손주들 과자값도 되고 세뱃돈도 되니 어른들에겐 일석 이조의 놀이임에 틀림없다. 친한 동네 어른들이나 친척끼리 도시락을 싸고 가서 고사리를 따다가 먹기도 하고, 노래도 흥얼거리며 고사리 따기의 흥을 돋운다.
이렇게 제주의 고사리철은 고사리꾼들의 희로애락을 한가득 주워 담으며 지나간다. 원망도 슬픔도 웃음도 잔뜩 따고 돌아오는 고사리 여행의 시끌벅적한 여정은 오늘처럼 안개가 끼고 비가 온 새벽 고사리꾼들을 다시 숲으로 불러드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