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 병동 6인실 이야기

-뇌출혈로 쓰러진 엄마의 간병 이야기-

by 가시나물

병원엘 간다는 건 발단 전개 같은 여유는 없다는 것이다. 인물을 소개하고 배경이 어딘지 어떤 곳인지 친절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이미 병의 발단과 전개는 오랜 시간 알 듯 모를 듯한 신호를 보내며 잠복해 있다가 어느 한순간 갑자기 절정으로 치달아 환자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아니 위험에 빠뜨린다. 그래서 병원은 절정부터다. 환자에게 위기와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발단과 전개의 정도가 어떤 상황인지, 어느 정도인지가 판가름한다. 엄마도 그랬다.

새벽 한 시. 갑자기 울린 전화 속 남동생의 목소리가 떨렸다. 엄마가 조금 다쳤노라고. 지금 한라병원에 있으니 빨리 오라고. 간신히 옷만 걸쳐있고 응급실로 뛰어갔다. 새벽 시간이라 차도 없고 조용한데도 내 마음이 시끄러워서인지 자꾸만 차가 막힌다는 생각이 들었다. 듣도 보도 못한 엄마의 뇌출혈.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병명을 엄마와 함께 연결 짓자니 막막했다. 어눌해진 말투와 마비가 된 채 축 늘어진 팔과 다리가 떠올랐다. 아니라고 몇 번이나 도리질을 했다. 며칠 전까지도 건강했던 엄마가 하루아침에 뇌출혈이라니. ‘제발, 제발’ 얼마나 마음속으로 빌었을까. 엄마를 찾으려는 눈과 다리는 이미 내 것이 아니어서 부들부들 떨리기만 할 뿐 내 손과 내 눈이 엄마를 기억하지 못했다.


'휘' 둘러본 응급실엔 갖가지 줄과 기계에 몸이 매달린 환자들과 주사기와 의약품을 든 간호사들의 바쁜 발걸음과 코로나 때문에 예전과 달라진 규정에 보호자들과 입씨름하는 직원들이 뒤엉켜 그 새벽 응급실 안은 어느 때보다 북새통이었다. 그리고 그곳 좁은 응급실 침대칸에 멍한 눈으로 누워있던 엄마가 들어왔다.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에 고개를 가누지도 못한 흐트러진 옷매무새의 엄마 눈엔 그야말로 참담함과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다행히도 엄만 나를 알아보고 조그맣게 대답도 해주고 교대로 확인하는 의료진들에게 아직 힘이 있는 팔다리도 움직여 보였다. 엄마한테 ‘잘했다. 참 잘했다. 정신 바짝 차려줘서 고맙다’고 몇 번을 되뇌었는지 모른다. 불행 중 다행인지 경과가 나쁘지 않았던 엄마는 우선 약물 치료로 시작해 보기로 해서 중환자실도 가지 않고 바로 일반 병실로 옮겼다.


응급 병동 6인 병실. 얼굴부터 다리까지 온통 멍투성이던 젊은 여자는 펜션에 놀러 왔다가 떨어져서 깁스를 하고 누워 한쪽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아무 말이 없다. 침대 밑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한 캐리어만이 여행의 뒷맛을 씁쓸하게 하고 있었다. 여행길이 한순간에 악몽으로 바뀌었으니 얼마나 황당할까. 우리 앞 침대의 혼자 있는 언니는 다리를 다쳤는데 아무도 면회를 오지 않는다. 월요일 퇴원할 거라는데 집에 가서 다시 밥하고 빨래하고 자기가 다 해야 한다며 너무 싫단다. 여기서 주는 밥 먹고 자고 쉬는 것이 더 좋다니. 어지간히 삶이 고단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병실에선 인기 스타였다. 재미있고 활달한 성격으로 휠체어를 타고 병원 여기저기를 활보한다. 어른들에게 인사도 대답도 잘해줘서 엄만 그 언니에겐 꼭 음식도 나눠주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바로 옆엔 엄마보다 하루 늦게 들어온 40대 젊은 엄마가 콧줄을 달고 기저귀를 차고 누워있었는데 뇌경색이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그 젊은 엄마는 어눌한 발음으로 병실 안 환자들을 참견했고 계속 뭔가를 요구해서 가끔 짜증 섞인 간병인의 목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옹알이 같은 부름에 그곳 여인들은 하나같이 ‘오냐, 맞아’ 어린애 얼르듯 큰 몸짓으로 대답해 주고 젊어서 괜찮다고 재활할 수 있다고 토닥거려준다. 생업에 한창인 남편이 오기라도 하면 웃음까지 지어 보이고, 아들 딸 얘기에 눈물도 짓는다. 전에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병실에선 모두가 같은 동지요, 가족이 되어 간다. 그래서 그곳엔 어떤 경쟁이나 다툼이나 시기가 없다. 누군가 퇴원하면 부러워하고 누군가 식음을 전폐하면 가지고 있던 과일이나 먹을거리를 아낌없이 내어놓고 누군가 환자를 부탁하면 걱정 말라며 천천히 다녀오시라 잘 보고 있겠다 안심을 시킨다. 구순이 넘는 어머니를 함께 간호를 하던 딸 셋은 주저 없이 침대 위로 올라가 가래를 뽑아내면서도 주름진 엄마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만 껌벅이는 엄마가 예쁘다 박수를 치며 좋아한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 법한데도 누구 하나 찡그리는 것 없이 웃음 한가득이다. 처음엔 내 앞의 불행과 위험에만 눈이 어두워 그네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 병원이 친정 같다는 딸들을 보며 코로나 때문에 '한 명 보호자 규칙'을 어긴 그녀들에게 누구 하나 불평을 하거나 뭐라 하지 않았다.

우리 엄마. 엄마는 핏기가 딱지로 변하고 있는 머리가 어지럽고 아프다고 하더니 갑자기 음식을 거부하셨다. 아무리 몇 숟갈 드시게 하려고 해도 도통 입을 열지 않는다. 점점 핏기가 없어져 가는 엄마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아니, 참으려고 해도 먹지 않는 엄마에게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먹어야 약이 받는다고. 먹지 않으면 기력이 떨어져서 안 된다고. 하나밖에 없는 딸하고 이십 년은 더 같이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래서인지 다행히 비쩍 말라가던 엄마도 주위 언니들의 충고와 나의 몇 번의 우격다짐과 진통제의 효과로 얼마 가지 않아 숟가락을 움직였고 군고구마, 달걀, 사과 같은 음식들이 엄마의 입맛을 조금씩 돌아오게 만들었다.

위기도 있었다. 동생과 교대하려 내가 잠깐 몸을 돌린 사이 갑자기 '꽝'하는 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전 침대 위에 있었던 엄마가 병원 바닥에 이마를 찧고 넘어져 계신 거였다. 뇌출혈로 들어왔는데 다시 머리에 충격이 가해진 거다.

"엄마"하며 엄마를 일으키는 내 손이 떨리고 목소리가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간호사들이 달려오고 교대하려 했던 남동생이 뛰어왔다. 바로 다시 CT를 찍었다. 얼굴이 하얘지고 말이 나오지 않고 다리도 팔도 덜덜 떨리고. 파리해진 누나를 보며 화내지도 물어보지도 못하고 답답해하는 동생.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그 시간은 정말 지옥이었다. 엄마한테 빌었다.

"엄마 딸 살려달라고. 만약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 어떻게 사냐고."

눈물마저 나오지 않던 망망대해 같던 그 몇 시간이 나에겐 지옥 그 자체였다. 다행히 별 이상이 없었다. 그때서야 다리가 풀리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화가 났다. 도대체 엄만 왜 그러냐고. 제발 침대 위에 가만히 좀 누워 있어 달라고. 화가 치밀었지만 내색할 수 없어 더 답답했다. 동생에게도 면목이 없었고, 무엇보다 엄마에게 너무 미안했다. 엄마가 다시 넘어졌다는 얘기만 듣고 병실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두 시간 내내 기다리다 집으로 돌아가던 남편이 "잘 좀 하지"했다가 그날 이혼할 뻔도 했다.

그 뒤로 난 병원의 문제아가 되었다. 분명 간호사가 바뀌었는데도 나만 보면 '환자를 혼자 놔둬선 절대 안 됩니다. 낙상하면 큰일 납니다. 화장실도 혼자 가게 하지 마세요'하는 거였다. '네.' 하루에도 몇 번씩 죄인이 되어 대답을 했다. 죄인이 뭔 말이 있으랴.

이렇게 이주일을 엄마의 컨디션에 따라 내 기분도 오락가락하는 병원 생활을 했다. 동생이 저녁은 책임지고 수업이 없는 날은 내가 엄마와 함께 했고, 내가 없는 날은 올케와 아빠가 돌아가면서 엄마를 지켰다.


그러는 동안 나의 조바심은 엄마가 가끔 단어를 잘못 말하거나 기억이 왜곡되면 취조하듯 질문 폭탄을 쏟아냈다. 뭔가 꼭 확답을 받아야겠다는 사람처럼 급하기 짝이 없다. 뇌를 다쳤으니 당연할 수 있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엄마의 기억은 안쓰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했다. 그러다가도 내 눈에 띈 가늘어진 엄마의 팔다리는 독하게 다그치려는 내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내가 그동안 저 팔에 안기어 자고, 먹고, 다독임을 받았고, 저 다리로 오누이 한번 잘 키우겠다고 길거리 꽃 심기, 연탄 배달, 고등어 장수까지 안 해 본 일이 없는 분이 아니었던가. 지금의 이 병도 젊은 시절 몸 아끼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한 대가라고 생각하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병원에서의 밤이 깊어간다. 하지만 쉽게 잠을 이룰 수는 없다. 다른 환자들의 기침 소리, 뒤척이는 소리, 두 시간마다 들리는 간호사들의 움직임. 몸은 천근만근 피곤한데도 마음만은 아직도 환한 대낮이다.

퇴원하기 전 날, 남동생과 함께 한 새벽 산책 중~


병원에서의 며칠은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환자들을 대하는 주위 사람들의 태도와 마음을 두고 점수를 매기게 되고, 알면서도 이해하면서도 내 삶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에 대해 너무 화가 나기도 하고 이제껏 아들딸 바라보며 살아오신 그 인생이 서글프고 불쌍하기도 하고. ‘가장 좋은 노후는 죽음’이라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멋지게 나이 들어가고 잘 죽을 수 있는 그런 삶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한다.

그래서 병원에서의 승자는 재벌도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아니다. 병을 이긴 사람, 그보다는 아무 이상이 없는 사람, 또 그보다는 지금 병원에 없는 사람, 그보다 더더더는 병원에 올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 엄마는 어디에 있다고 말해야 할까. 치료법이 눈에 보이니 괜찮은 편이라고 해야 할까. 앞으로 평생 조심해야 하고 살얼음 걷는 기분으로 살아야 하니 못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분명한 건 엄마가 여전히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엄마의 쾌유를 바라는 응급 병동 6인실 사람들의 마음이 있어 그리 외롭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일주일 후 우리는 1인실로 옮겨 닷새를 더 살고 병원을 나왔다. 지금은 그래도 아빠와 과수원도 가시고, 걷기도 하시고 많이 좋아지셨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또다시 무정한 딸로 돌아가 있다.

하지만 나는 바란다. 응급 병동 6인실의 누군가에게 다시 여행이 즐거움이 되기를, 삶이 편안하기를, 노모가 낮잠을 잤던 것처럼 깨어나기를, 젊은 엄마가 하루빨리 아들과 딸을 품에 안을 수 있기를 말이다. 그래서 병실을 나서서 연락이 닿지 않더라도 응급 병동 6인실 환우들이 어디에서라도 건강하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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