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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시나물 Feb 10. 2021

학예회의 추억

-어린 시절 초등학교 학예회를 떠올리며-


 "큰엄마, 유치원에서 학예회 할 거예요. 코로나 때문에 우리끼리 축제한대요"

 "우리 은서는 뭐 할 건데?"

 "노래하고 춤 출거예요"

마스크를 끼고 놀아야 하고 종일 답답할 텐데도 학교 병설 유치원이 좋기만 한 조카가 헐레벌떡 들어와서 하는 말이었다. 무대에 오르지도 않고, 부모님도 초대하지 못하는 학예회를 저리도 좋아할까. 왠지 짠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정작 학예회를 해야 하는 날, 제주에 갑자기 코로나가 급증했다. 한 자릿수였던 확진자가 갑자기 이십 명, 삼십 명 늘기 시작하고 너무도 바쁜 문자엔 계속해서 동선이 공개되는 등 섬 전체가 긴장으로 얼어붙을 때 조카의 학예회가 겹치고 말았다. 동서 대신 조카를 데리고 나오는 길에 학예회 잘 끝냈느냐는 내 질문에 친구 여섯 명이 왔다는데, 뭔가 해 보지도 못하고 싱겁게 끝나 버린 조카의 학예회를 생각하니 코로나가 정말 야속했다.


  예전 초등학교 우리 학예회는 일 년 중 가장 큰 행사였다. 이틀로 나누어서 학교 밖 시민회관이나 학생회관을 빌려서 학예회를 했는데, 각 반마다 합창, 중창, 독창, 무용, 연극을 무대에 올렸고 전시회로는 시화, 서예, 그림 등등 정말 다채롭고 화려한 시간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전교생의 절반이 넘게 학예회에 출연했고 무대에 설 수 있는 아이들은 반에서 뽑힌 사람들이라는 뭔가 의기양양함도 있었던 것 같다. 대신 무대에 서지 않은 아이들은 전시회에 작품을 내느라 방과후에 작품을 만들어 냈다. 학예회에도 빈익빈 부익부가 있었던지 중창을 하던 아이가 합창을 하고 합창을 끝내고 독창으로 무대에 섰던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학교는 그야말로 시끌벅적 정신이 없었다. 학예회 총연습을 하는 날엔 하얀 스타킹을 신고 복도를 뛰어가는 아이들, 까만 스타킹에 얼굴 가득 선명한 세 줄을 그린 인디언 복장의 아이들, 발레복에 화려한 머리띠를 하고 진한 화장을 한 아이들이 여기저기 옷을 벗어 놓고, 시끄럽게 떠들고 예행연습을 하고, 아직 오지 않은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선생님의 높은음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한 달 이상 학교는 학예회 준비로 수업을 했는지조차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5학년 때 나는 연극을 하게 됐다. 연극은 반에서 공부 좀 한다 하는 아이 두 명 정도가 뽑혔는데 반이 아홉 개였으니까 열여덟 명쯤 한 자리에 모였다. 연극의 대본은 이미 나와있고 역할을 정해야 하는데 선생님께서 유독 고민을 하는 눈치였다. 여주인공으로 염두에 뒀던 아이가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은근 나와 다른 반 친구 중 하나를 선택하려 했던 것 같다. 내가 봐도 얼핏 주인공을 해야 할 아이는 나였다. 근데 나는 키가 작고 역할엔 맞았으나 뭔가 선생님이 주저하는 분위기였고, 다른 반 반장이었던 친구는 키가 너무 컸다. 그래서 주위에선 내가 주인공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나는 "제가 친구 할래요"하고 말하고 말았다. 무슨 오지랖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친구가 꼭 그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친구가 주인공으로 낙점되었고, 나는 주인공 친구 역할을 맡았다.

 그렇게 대본을 외우고 연습을 하고 드디어 기다리던 학예회 날이 되었다. 무대에 서기 위해 앞 순서들을 구경하다가 깜깜한 공연장을 나왔더니 나와 연극을 같이 하기로 한 친구들의 얼굴이 예전과 너무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남자건 여자건 친구들의 얼굴은 평상시와 다르게 진하고 예쁜 눈 화장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반짝반짝거리는 화장 덕분에 눈매도 또렷해지고 빨간 입술과 유난히 빛이 나는 얼굴들은 뭔가 자신감이 넘쳐 흘렀고 정말 연극배우 같은 포스였다. 근데 난 아니었다. 그 친구들 틈바구니 속에서 나는 우리 엄마의 세련되지 못한 화장 덕에 한 건지 만 건지 한 얼굴로 무대에 섰다. 연극을 하는 내내 친구들과 자꾸만 비교되는 것도 싫고, 몰라보게 예뻐진 친구들의 얼굴이 부러워 나는 왜 이렇게 밖에 화장을 못했지라는 실망이 밀려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젊었던 엄마도 그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던 것 같는데 그 순간만은 괜히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관객들을 앞에 두고 연기를 하는 건 정말 재미있었다.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였으니. 그렇게 그날 무사히 학예회를 마쳤는데 며칠 후 지방 방송국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우리 연극을 녹화해서 내보내겠다는 제의가 왔다고 해서 우리들은 다시 한번 무대에 서야 했다. 난 학예회 날을 떠올렸다. 그리고 희미했던 내 화장이 맘에 걸렸다. 거기다 이번엔 방송국에서 녹화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번만큼은 나도 예뻐 보이고 싶었다. 엄마를 조르고 졸라 미용실 아줌마한테서 화장을 받고 의기양양하게 학교엘 갔다. 미용실에 딸린 방 한켠에 누워 아줌마가 해 주는 손길에 흐뭇하게 나를 맡겼던 기억이 새롭다. 아무도 나를 무시하지 못하겠지, 나도 이제 연극배우다 하면서 교실 문을 연 순간!  맙/소/사! 얼른 화장실로 뛰어가 세수를 하고 싶었다. 시어머니와 텔레비전을 보는데 야한 장면이 나와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서 피하고만 싶은 그때처럼 난 내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만 싶었다. 친구들의 얼굴은 학예회 때보다 훨씬 화장이 옅어졌고 자연스러워졌고 희미해져 있었다. 그런데 주인공도 아닌 내 화장은 오히려 엄청 진해져서 주객이 전도되는 그런 상황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부끄러웠다. 쥐구멍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아찔했다. 어쩌다 이런 일이. 그때 들었다. "저 아이 정말 요망진게(야무지고 똑똑하다의 제주어)" 근데 난 그 칭찬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6학년 때 학예회는 사회를 맡았다. 그때 학예회에서 사회를 본다는 것은 전교생을 대표하는 거였기 때문에  정말 가문의 영광인 자리였다. 그래서 보통은 전교 어린이 회장과 부회장이 사회를 맡아 오전 오후를 진행했는데 유독 그때는 선생님들의 기획에 따라 학예회 진행이 조금 달라졌다. 전교 어린이 회장은 첫인사를 단독으로 하고, 부회장은 끝인사를 단독으로 해야 하니 사회는 남자 부회장과 학습 부장이었던 내가 맡아야 하는 거였다. 사회라니. 친구들의 부러움을 뒤로하고 멘트를 한가득 쓴 수첩을 들고 한복을 입고 무대에 섰다. 1,2층으로 꽉 찬 학생들 앞에서 글을 읽듯 하는 소개였는데도 뭔가 짜릿함이 남달랐다. 묘한 긴장감과 쾌감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학예회의 재미있는 후일담은 엉뚱한 곳에서 터지고 말았다. 나와 같이 사회를 본 남자 부회장은 마른 몸에 키가 큰 데다 예쁘게 화장을 했고 키가 작고 다부졌던 나는 맨얼굴에 한복 차림이어서 남녀가 바뀐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나중에 찍힌 사진을 봤는데 정말 뽀얗고 하얀 얼굴의 다소곳하게 서 있는 남자 부회장과 검으스름 한 얼굴에 마이크를 대고 있던 내가 얼마나 대비가 되는지.

 사실 그땐 엄마들의 치맛바람이 심한 때였다. 그래서 잘 사는 집 아이와 못 사는 집 아이의 차이도 많았다. 보통 반에서 반장 부반장이라면 어린 눈으로 볼 때도 우아하고 세련된 엄마들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 집은 그러지 못했다. 조금 못사는 편이었다. 그래서 부반장이 돼서도 소풍 때 선생님 도시락 때문에 고민이 많았고  엄마가 보낸 과자를 담임 선생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교단 밑으로 차 버리는 장면도 봤다. 그러니 우리 엄만 학예회 때 어떻게 화장을 시켜야 하고, 무엇을 챙겨서 아이를 보내야 하는지 몰랐다. 매일 학교를 드나드는 엄마가 아니었던 거다. 그런데도 부반장을 하면서 이래저래 까부는 내 덕분에 엄마는 말리지도 못하고 맞춰주지도 못하고 많이 힘들었던 거 같다. 그렇다고 기가 죽거나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다. 그냥 가끔 이렇게 당황스러운 장면이 연출된다는 것 빼고는. 이러니 부모님 회의에 매일 못 온다고 해야 하니 부반장 하지 않겠다고 했던 동생이 오히려 나보다 더 철이 들었던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나의 웃픈 학예회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어린 시절 연극을 해 보고 학예회 사회를 봤던 경험이 두고두고 무대에 서는 시간들의 근간이 되었던 것 같다. 마이크를 별로 무서워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서는 것이 별반 어려운 일이 되지 않은 것을 보면.      


 지금은 학예회의 모습이 예전과 많이 달라진 것 같다. 모든 아이들이 함께 하는 학예회로 바뀌기도 했고, 지나친 연습으로 보여주기 식 학예회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아니 연습을 하려 해도 아이들의 바쁜 스케줄로 진행하기가 어려운 점도 있어 보인다. 내가 강사로 있던 조그만 학교의 학예회엔 분장이나 화장이나 하는 것은 없었다. 소박하고 작은 학예회로 그동안 배웠던 악기 연주나, 합창, 작품들의 전시회로 구성되어 더 살뜰하고 정겨웠던 자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조카 은서의 학예회를 보며 삼십 년도 훌쩍 넘은 학예회의 그때 나를 떠올리며 생각해 보니 내 모습이 어리숙하고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그렇다. 그래도 그때 무대에 서는 것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했던 열두 살, 열세 살의 내 모습을 다시 만난다면 토닥토닥 해주고 싶다. 그래도 씩씩하게 잘했다고. 아무나 못하는 거였다고. 오늘 그 시절 그때로 돌아가는 무전기가 있다면 큰소리로 말하고 싶다. 응답하라,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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