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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시나물 Apr 30. 2021

'한탸'만이 삶을 사랑할 권리가 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읽고

 태양에게 흑점의 의미란 무엇일까? 은빛으로 눈부신 태양의 흑점은 오점일까, 장점일까. 태양의 흑점은 눈에 잘 띄기도 하고 주변 온도 보다 낮지만 자기장은 센 곳이라고 한다. 괴테가 말한 '태양만이 흑점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고민해 본다. 아마도 인간의 고통이나 슬픔 아니면 기쁨까지도 치열하게 살고, 사랑한 사람만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미치니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 주인공 한탸를 보고 떠올린 작가의 핵심 문장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라는 제목부터가 극한 대조를 내포하고 있으니 주인공 한탸의 삶이 얼마나 치밀하고 처절하고 몰입된 시간일지를 예측해 본다. 무엇이 그의 고독을 시끄럽게 하고 있을까? 고요하고 차분한 고독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내면세계의 갈등과 환희와 분주함이 고독마저도 시끄럽게 만들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책장을 폈다.  


 책과 폐지를 압축하는 삶을 삼십오 년째 해오는 한탸. 그는 그의 이런 시간이 자신만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임을 밝히며 신께서 축복하는 작업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한탸는 책을 압축하는 이 일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신학 학위가 최고의 조건임을 강조한다. 한탸의 일이 이렇게 성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에게 책이 단지 단순한 지식을 쌓거나 잠을 자거나 오락거리가 아닌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선택된 문장을 뇌 속으로 심장으로 혈관으로 스미게 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만큼 책은 한탸만의 또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이요, 한탸의 꿈속 아름다운 세계인 진실의 한복판에 이르게 하는 매개체이며 행복의 세계인 것이다. 하지만 한탸는 자기가 책을 압축함으로써 희귀한 책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상냥한 도살자에 불과하다고 자책한다. 그리고 그런 행위를 통해 파괴하는 기쁨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하늘이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된다. 하늘이 인간적이라면 이렇게 중요하고 고귀한 책들을 압축해서 없애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프로이센 왕실 도서관의 책들을 열차 안에서 비를 맞게 해 쓸모없는 물건으로 만들어 버리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하실이 한탸에겐 지식을 쌓는 곳인 동시에 책을 통해 알게 된 수많은 지식인, 예술가, 사상가를 환영으로 만나는 곳이며 고단한 집시 여인들에겐 잠시의 휴식처가 되는 곳이며 그곳에 살고 있는 쥐들에겐 죽음과 삶의 전쟁터가 되는 곳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탸는 노자와 예수를 만나고 수많은 화가를 영접한다.


 한탸의 삶엔 온통 책이 함께 한다. 삼촌의 장례식을 치를 때에도 그의 곁엔 젊은 칸트의 책이 함께 했다.

 "여름밤의 떨리는 미광이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하고 달의 형태가 정점에 이르는 순간, 나는 세상에 대한 경멸과 우정, 영원으로 형성된 고도의 감각 속으로 서서히 빠져든다"

 그리고 압축기의 녹색 버튼과 붉은색 버튼을 누르다가 멈추면 술과 함께 칸트의 '천계론'을 읽으며 폐지를 압축하는 일이 암살이며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 자위하며 자신의 비극적인 감정을 느낀다.

그랬기에 한탸는 책들에게 작고 아늑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고, 죽음으로부터 책의 생명을 구하는 일을 삶의 기쁨으로 알고 오 년 후 은퇴를 할 때도 압축기를 사서 자신만의 예술품을 만들며 살아가길 희망했다. 자신만의  사고로 가득 찬 행복한 고독을 즐기기를 말이다.  

 그러나 그런 한탸를 이해하지 못하고 매일 술에 절어서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소장의 불평과 잔소리는 한탸의 꿈에 위협 요소가 되었고, 결국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부브니의 수압 압축기는 한타의 꿈을 철저하게 망가뜨리는 파괴자가 되었다.  

 폐지 더미 속에서 희귀한 서적의 책을 발견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던 한탸에게 이 거대한 수압 압축기는 어떠한 사정도 봐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책들에 대한 살인을 저지른다. 더구나 그 기계로 작업을 하는 젊은이들이 끼고 있는 장갑에 한탸는 모욕을 느낀다. 종이의 감촉을 더 잘 느끼기 위해 장갑을 끼지 않는 한탸에 비해 그들은 책에 대한 어떠한 경외심도 품지 않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책은, 그들에게 이탈리아나 그리스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의 목적일 뿐이고 여행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탸에게 책은 자신의 전부였으며 철학자들이 예술가들이 삶의 흔적을 남긴 문화의 성지였기에 새 인간과 새 방식에 의해 한탸의 행복은 직격탄을 맞게 된 것이었다.

한탸 역시 새 시대의 막이 오른 만큼 그에 맞추기 위해 책들의 수다를 모른척하고 책들을 한낱 처리해야 할 물건으로 보며 무감각하게 보수를 받고 일하는 사람일 뿐이라 생각하려 하지만 그건 눈 가리고 아옹이었던 듯싶다. 새로운 삶에 적응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기가 살아있으려면 반드시 함께 해야 하는 것들, 압축기와 지하실과 책으로 돌아갈 수 없음에 절망을 느끼는 한탸의 모습은 삶의 터전인 지하실의 압축기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생쥐 그 모습이었다.

 결국 한탸는 그곳에서 금빛 욕조 속에서 자신의 사고가 정확했음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손목을 그은 세네가를 환영으로 보게 된다. 마치 자신의 앞날을 암시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끝내 전진이 후퇴임을 절감한 채 한탸는 자신만의 천국인 지하실 압축기 안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아무도 아무것도 자신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행복이라는 불행을 짊어진 한탸의 삶은 처음부터 끝가지 그렇게 모순과 대조와 희비가 교차했다. 책을 사랑하지만 압축해서 폐기해야 하는 삶, 미래로의 전진이 아닌 미래로의 후퇴임을 못 견디는 삶, 무지의 사람들 속에서 혼자만 느끼는 지적 세계의 삶, 아무도 값어치 있다 여겨주지 않는 삶. 자의든 타이든 얻게 된 '고독'의 삶. 한탸의 삶은 아마도 체코 정부의 검열과 감시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보후밀 흐라발'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지상의 세계가 아닌 지하의 세계에서 자신만의 시끄럽지만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려고 했던 한탸의 아니, 작가의 처절한 몸부림은 아니었을까.

지하실의 시끄러운 고독의 세계에서 책을 통해 삶의 위안을 얻고 책을 통해 미래를 꿈꾸고 책을 통해 현실을 자각하는 슬픔을 느꼈을 한탸에게 한탸만이 삶을 사랑할 권리가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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