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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시나물 Apr 09. 2021

사랑의 프리즘

-'그 남자네 집'과'메디슨 카운티의다리'-

'사랑'은 다채롭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첫사랑', 나도 모르게 눈길이 자꾸만 머무는 '짝사랑', 나 혼자만의 일방통행인 '외사랑', 해서는 안 되는 사랑, 해도 불행한 사랑, 잊힌 사랑, 먼 미래를 꿈꾸는 사랑, 동성 간의 사랑. 그 다양한 사랑의 여러 빛깔들을 하나로 모으면 과연 어떤 색이 될까?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과 로버트 제임스 월러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사랑'이라는 공통분모 위에 첫사랑의 풋풋한 사랑과 일평생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 확실한 중년의 밀도 있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


 박완서의 마지막 장편 소설인 '그 남자네 집'은 문학이 그녀에게 연꽃이었듯 전쟁 후의 삶 속에 필 듯 필 듯 피지 못한 아쉬움의 첫사랑을 그리고 있다. 어머니 외가 쪽 친척의 아들. 서로의 존재를 알긴 했으나 눈길 마주치는 것조차 어색했던 고교 시절을 지나 구슬 같은 겨울 시절을 함께 했던 첫사랑. 시를 좋아하고 예술을 사랑했던 그 남자와 그의 가족들. 전쟁통에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행상을 하고, 북으로 간 아버지와 큰형, 남에서 군대를 갔던 막내아들로 가족들이 남과 북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그 남자의 시간은 명예 제대한 상이군인으로서 전쟁의 상처를 안은 채 그렇게 채워져 갔다. 그 속에서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어 만난 둘.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확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절절 끓지도 않는 둘의 사랑. 만나면 반갑고 남대문 시장을 활보하며 아슬아슬 감정과 현실 사이의 징검다리를 두들겼지만 결국 주인공 나는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현보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헤어지고 나서야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후회와 절망의 시간을 갖게 된다. 우연히 만난 그 남자 누나의 주선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둘. 여자는 그 남자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싱그럽고 감미롭고 애달픈 느낌으로 그를 만나기 위한 지루한 시간만 맥박 치며 빛난다. 결국 다시 재회한 둘이었지만 사회적으로 금기된 사랑을 하는 둘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청량리 역사에서 만나 여행을 떠나기로 했지만 결국 나오지 않은 현보. 나중에 여자는 그가 갑자기 쓰러지고 수술을 받게 되고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상황을 알게 된다.

 박완서 작가가 그리려 했던 '사랑'의 빛깔은 어떤 거였을까? 사회적 시선이나 관념까지 모두 저버릴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랑을 그리고 싶었을까?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의 아쉬움을 토로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 스스로 연서를 쓰는 기쁨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하니 전쟁의 상흔으로 힘들었던 작가에게도 그 시대를 잊게 했던 달콤하고 시원한 오아시스 같던 사랑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솔직하지만 현실적이고, 어설펐던 그 첫사랑이.


 그와는 달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보다 사랑의 빛깔이 분명하고 방향이 확실하다. '그 남자네 집'이 맑고 투명하기만 한 색채를 띤다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정열의 빨간빛을 불사르며 사그라드는 저녁노을 같다. 단 나흘간의 만남과 사랑. 사랑을 하기에 시간도 공간도 그 어떤 사회적 제약도 방해가 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이야기. 서로가 서로를 알아봤던 프란체스카와 로버트 킨케이드의 사랑. 이 소설의 압권은 프란체스카의 용기와 당당함이었던 것 같다. 뭔가 끌리는 느낌으로 로즈먼 다리에 자신의 마음을 담은 쪽지를 둔 것이나, 가정을 지키고 그 의무를 다하고 나서 남겨진 자식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감추지 않고 당당하게 진실을 세상에 드러낸 용기는 아마도 자신을 사랑하며 혼자 아팠을 킨케이드를 향한 그녀만의 사랑의 표현이었으리라. 강열했지만 너무도 짧은 사랑을 생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 간직하며 서로를 그리워했던 둘의 사랑이 애절하다 못해 서글프기까지 했다. 자꾸만 설레는 감정으로 음식을 만들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새로 산 원피스를 갈아입는 프란체스카의 모습이 떠오른다. 가족을 지키려는 프란체스카와 그녀를 배려하고 위하는 킨케이드의 깊고 슬픈 눈이 오버랩된다.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맘 놓고 소식조차 알리지 못한 킨케이드. 어느 선 술집에서 그녀와의 추억을 돌이켜보며 음악을 듣는 백발의 킨케이드의 쓸쓸함이 진하게 우러 난다.

 저녁노을처럼 진한 빛을 불사르고 자신의 끝을 안다는 듯이 바다 속으로 서서히 잠식해 가는 시간처럼 킨케이드와 프란체스카는 둘의 마지막을 알고 있었기에 서로가 더 소중했는지도 모르겠다. 진실한 사랑임을 알고 있었기에 떨어진 시간과 공간이 그 빛을 퇴색시키지 못했으리라.


어느 빛의 사랑이 좋은지에 대한 우열은 없다. 그 사랑을 대하는 마음과 태도가 어떤지에 대해 슬퍼하고 감동받고 아파할 뿐.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 사회제도인 '결혼'도 '지위'도 '국경'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사랑'은 그저 자신만의 색채로 빛날 뿐이다. 두 권의 소설을 읽으면서 유부녀와 그 남자의 사랑이 거슬리지 않았고, 가정을 가지고 있는 여자로서 해야할 마음가짐이나 행동을 떠올리지도 않았다. 그저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와 그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만을 떠올렸을 뿐. 그들의 소중한 감정만을 음미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에게 사랑의 프리즘을 비춘다면 어떤 색이었을까? 나에게도 철없던 시절, 앞뒤 따지지 않고 푹 빠졌던 '첫사랑'이 있었고, 이래야 하나 저래야 하나 계산기를 두들겼던 '사랑'도 있었고, 안정감을 주는 '따듯한 사랑'도 있었다. 매 순간 사람이 달랐을 때도 있었고, 호감만 갖다가 멀어진 적도 있었고, 마지막 한 사람만 남아있었을 때도 있었다. 계산을 했다 해서, 연인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친구로 남았다 해서, 서로 영영 만나지 못했다 해서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 순간 그 감정에 충실했다면 그건 '사랑'이었을 것이다. '사랑'에 법칙도 없고 이래야 한다는 당위도 없는 것처럼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지극히 이기적일 수도 있다. 그 사랑에 치이고 그 사랑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아파한다고 해도 그리 슬퍼할 필요도 없다. 사랑은 생명이 있는 것이어서 언젠가는 사멸될 수도 있고 언젠가는 또 새로움을 잉태할 수도 있으며 또 언젠가는 슬그머니 사라졌다가 되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언젠가 또 '사랑'이라는 감정이 슬그머니 찾아올 때는 프란체스카의 사랑을 하고 싶다. 모든 것을 던져도 후회가 되지 않을,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한 그런 사랑 말이다.

 봄이지만 가을 같은 '사랑' 소설을 읽고 지금도 한창 기분 좋은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다. 두 소설이 선물해 준 느닺없는 '사랑'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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