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는 두 사람이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있는 가정을 만나면 언제나 빠짐없이 도마에 오르는 주제 '육아'.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가지만 대부분 그들의 아이들이 몇 살이고 어제는 어떤 신통한 말을 했고 지난주에는 어떤 귀여운 행동들을 했는지와 같이 아이들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을 이룰 때가 많다. 하지만 종종 남편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는 이런 말을 듣기도 한다. "내가 일이 바쁘다 보니까 아내를 많이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지"
아, 눈물 나게 진한 아내에 대한 사랑이어라! 하지만 굳이 도와준다는 표현을 써야 했을까? 굳이!?
남자는 생계를 위해서 밖에서 노동을 하고, 여자는 가계를 위해서 집에서 노동을 하는 것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왔던 한국에서는 육아를 이렇게 표현한다. '남편이 아내를 도와서 하는 일'. 자신의 꿈을 위해서 혹은 생계를 위해서 치열한 바깥세상의 노동 현장으로 뛰어든 여성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표현에는 변함이 없다.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는 시대에 일은 똑같이 하면서 육아는 여자가 맡아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다니!
물론 임신과 출산은 생물학적인 이유로 남자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육아는 남자도 할 수 있다. 아이를 재우고 먹이고 놀아주는 모든 것들은 남녀 상관없이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육아는 가정을 이루는 두 사람이 논의하여 결정한 일이고 그것에 대한 책임은 결정을 내린 두 사람 모두가 져야 하는 일이지 둘 중 한 사람만이 지고 갈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신과 출산은 도와줄 수 있지만 육아는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다.
육아를 도와준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는 양가 부모님이나 그 밖의 다른 누군가처럼 두 사람을 제외한 모두일 뿐 가정을 이루는 당사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도와준다는 표현은 "내 아이는 아니지만 네가 힘들지 않기 위해서 내가 기꺼이 도와줄게"라는 것처럼 서로가 함께 만든 생명을 한 사람이 혼자 만든 생명인 것 마냥 남의 일로 여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표현이 훨씬 낫다. 당신과 나 그리고 아이까지 우리 모두를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마음을 담아서.
사실 한국에서는 부부가 함께 하는 양육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아무리 가족을 위하여 시간을 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법으로 정해진 육아휴직 하나 마음 편하게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웨덴에서는 부모가 모두 아이들을 양육하는 환경이 자연스럽다. 아빠가 낮 시간대에 아이의 유아차를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은 육아를 위해 근무 시간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육아를 함께 할 수 있다.
한국은 이처럼 한 가정이 온전히 육아에 집중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 생각은 하지도 않으면서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는 출산이 필요하다고 외친다. 하지만 국가의 미래를 위해 임신과 출산을 하게 되면 개인의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 현실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일을 해야만 하고 누군가는 집에서 아이를 돌봐야만 하는 그런 상황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육아를 도와준다는 표현이 가능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종종 이런 현실을 직시할 때면 과연 한국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런 의문에도 불구하고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거치든 그렇지 않든 육아를 도와준다는 생각이 아니라 함께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더 많아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생각이 변화되면 개인의 행동이 변화하고 개인의 행동이 변하면 사회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