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기도 하고, '어른이'이기도 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동화 속에서 해피엔딩을 말할 때 언제나 빠짐없이 나오는 이 이야기가 당연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 누군가는 그 이야기가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 누군가를 담당하고 있다. 꼭 둘이나 셋이 아니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그런 류의 인간. 하지만 인생은 불확실함의 연속이라 했던가 이런 나에게도 불쑥 틈이 찾아왔다. '둘이 아니라 셋 일 때 더 행복할 수도 있겠다'라는 틈. 갑자기 들이닥친 틈 속에서 무엇이 최선일지 고민하는 지금, 나는 나의 주변을 찬찬히 살펴본다.
교복을 입고 막연히 다가올 미래에 대해 생각하던 나이일 때, 지금의 나는 이토록 유치하고 서툴지만 서른이라는 나이가 되면 농익은 어른의 멋이 뚝뚝 흘러내리는 사람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 자기 일 똑 부러지게 하고 어떤 일을 맡든 척척 해내고 스스로에게 당당하며 자신감 넘치는 그런 어른.
하지만 시간이 흘러 막상 서른이 되어보니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덜렁거리느라 물건 하나 잘 잃어버리고 잘 넘어졌으며 작고 복슬복슬한 동물인형을 보면 갖고 싶어 졌고 다큐멘터리 같은 진지한 이야기보다는 간질간질하고 유치한 사랑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 하하 호호 웃으며 교복 입고 지나가는 학생들 사이를 무심하게 걸으면서 '참 좋을 때다'라고 생각하는 순간이나 케이크 위에 올려진 초의 길이가 세 개나 길어져 있는 순간이나 간간히 날아오는 친구들의 청첩장만이 서른이라는 나의 나이를 실감 나게 해 줄 뿐이었다.
서른.
모두가 결혼을 하고 귀여운 자녀를 낳아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거나 모두가 멋진 직장에서 일하는 나이일 것만 같았지만 이 순간 나를 포함한 나의 주변에는 각양각색의 모습을 한 서른이 존재했다.
여덟 시가 되면 아이를 재우며 빠른 육아퇴근을 꿈꾸는 서른, 퇴근길에 맥주 한 캔 사서 들이키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된 서른, 학창 시절에 공부 밖에 모르다가 이제야 아이돌의 매력에 빠져버린 서른, 이 일이 아니라도 다른 멋진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며 유유자적하게 호수 위의 백조처럼 사는 서른, 사람이 아닌 일을 사랑하겠다고 집과 회사만 다니는 서른,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연애를 해보지 않은 서른,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내 인생에 결혼은 없다고 외치며 뜨거운 연애를 즐기는 서른, 죽네 사네 지지고 볶다가 화려한 싱글로 되돌아온 서른... 똑같은 나이지만 다들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학생 때는 모두가 공부를 했고 모두가 대학교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했다. 다른 얼굴 다른 성격이지만 같은 옷을 입고 같은 학교를 다니며 같은 음식을 먹었기 때문일까 내가 이렇게 사니까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다들 그렇게 사니까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그러나 사회에 발을 내디디니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길을 걸었던 친구들이 하나 둘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들과 다른 길 위에 서 있지만 때때로 저마다의 삶을 훔쳐보면서 내가 걸을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친구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다들 이렇게 사는구나 나도 이렇게 살아볼까?'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자유로운 영혼처럼 자기만의 인생을 사는 친구들을 볼 때면 나는 여전히 어리고 젊었으며 한 아이의 엄마가 되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같은 서른이지만 너무 극과 극인 주변의 모습들을 보다 보니 '굳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릴 적 상상했던 어른의 모습으로 동화 속 이야기를 살고 있는 서른도 있고 원더랜드 속에 사는 피터팬처럼 늙지 않는 서른도 있는 이 순간, 다양한 서른의 모습들은 나의 서른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만든다. 학생 때처럼 모두가 같은 모습을 한 서른이었다면 나의 틈 역시 확신으로 거듭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낳으면 되는 거지 뭘 그렇게 오래 고민해!"라는 말 따위 들을 일도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이토록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의 이면에는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라는 두려움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잘 안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말처럼 무언가 시작되기 이전만큼 앞을 알 수도 없고 두려운 것도 없을 테니까.
남들 다하는 것이고 막상 하고 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일 테지만 그럼에도 나는 조금 더 치열하게 생각하고 고민하기로 했다. 사는 모양이 저마다 다른 모양이듯 나의 모양도 다르기 때문에, 저들이 아이를 낳아서 살고 있으니까 나도 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부담은 가지지 않기로 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결혼이든 출산이든 '멋모를 때 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냥 되는 대로 물 흐르는 대로 살다 보면 그렇게 살아지겠지만 계속 그렇게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 흐르는 대로 살다가 닿은 그곳이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었다면 훗날 무척 후회할 것 같으니까.
하고도 후회하게 되고 하지 않고도 후회하게 되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이왕 하는 선택 조금이라도 덜 후회하게 더욱 치열하게 나와 대화하고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의 서른,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