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이 일찍 손주 보기를 원하셔서 자녀계획을 서둘렀어."
"나는 원하지 않았는데 부모님이 빨리 아이 낳으라고 해서 낳았어."
"집안어른이 편찮으시니 어서 임신해야지."
"얼른 임신해서 부모님께 효도해야지."
이상하다.
너무 당연하게 들리는 말들이라서 누군가는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을지도 모를 말.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왜 임신과 출산의 과정에 부모님의 결정이 들어가는 걸까? 왜 임신과 출산이 효도라는 걸까?
1. 완전한 독립
세상에 태어난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의 돌봄 아래에서 인생을 배우면서 성장을 한다. 그리고 어엿한 성인이 되면 결혼을 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리거나 출가하여 독신으로 사는 등 저마다의 방법으로 독립을 한다. 독립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다른 것에 예속하거나 의존하지 아니한 상태'도 있지만 '개인이 한집안을 이루고 완전히 사권을 행사하는 능력을 가짐'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독립은 새로운 모양의 가족을 만드는 것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부모님 슬하에서 자랄 때의 가족의 형태는 <아버지, 어머니, 본인, 동생>으로 이뤄진 동그라미라면 결혼을 하고 난 후에는 <아버지, 어머니, 동생>과 <본인, 배우자> 이렇게 두 개의 동그라미가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 이전의 나는 삶의 중요한 선택을 할 때 부모님과 함께 상의를 하여 결정했다면 독립 이후에는 새롭게 가정을 이룬 배우자와 함께 상의를 해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본인, 배우자>가 아니라 기존의 가족 모양에 배우자만 추가된 <아버지, 어머니, 본인, 배우자, 동생> 이렇게 이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두 사람의 2세를 결정할 때 부모님의 입장을 고려한 말들이 나올 이유가 없지 않을까?
자녀를 낳고 기르는 것은 한 가정의 주체가 되는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결정해야 할 문제다. 새로운 생명을 만들고 낳아서 키우는 모든 것들은 가정을 이룬 두 사람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지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생명을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중요한 일인 만큼 서로가 진지하게 상의하고 결정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이런 결정을 두 사람이 아닌 집안의 어른이 손주를 보기 원한다는 이유 혹은 그들이 낳으라고 했다는 이유로 내린다면 그들이 정말 독립된 가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진정한 독립이란, 한 가정에 속하지 않는 타인의 상황에 의해서 불가피하게 가정의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이루는 주체 간의 충분한 의사소통을 통해 결정이 이뤄질 때 가능하다. 특히나 인생이 송두리 채 바뀔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그들의 기존 가족이 시켰다는 이유로 급하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오은영 박사가 한 육아프로그램에서 말하기를 육아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자녀의 독립이라고 했다. 정말 당신이 진정한 육아의 목적을 달성하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결혼한 당신의 자녀들의 진짜 독립을 원한다면 이제는 그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고 시키는 일은 멈춰야 한다.
독립을 했다면 그리고 배우자가 생겼다면 그때부터 두 사람의 1순위는 기존의 부모님이 아닌 자신이 선택한 배우자가 되어야 한다.
2. 인간의 존재 이유
어쩌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마지막 소원으로 손주를 안아보고 싶다는 것 하나 못 들어주냐?"라고. 하지만 집안의 어른이 편찮으시다는 이유로 원하지 않는 이들에게 일찍 출산해야 한다고 부추기는 것은 여자를 출산을 위한 도구로 보는 것 아닐까. 저버리는 생명의 마지막 소원이라는 이유로 살아있는 생명에게 새 생명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그에게 또 다른 폭력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나의 시아버님은 지독한 알코올중독자이자 흡연가이셨다. 처음 본 누군가가 봐도 그의 건강이 굉장히 염려될 정도로 쇠약하셨던 분이셨다. 그런 분이 어떤 계기로 인해 단칼에 금연과 금주를 실천하셨는데 변한 그를 만난 어른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술과 담배를 모두 끊으셨는데 이제 다른 낙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라고. 이토록 의도가 다분한 질문을 받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른 척 "건강한 낙이 얼마나 즐거운데요"라고 대답했지만 참 이상했다. 집안 어른이 건강하든 아니든 응당 결혼한 며느리라면 빠르게 손주를 안겨줘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 편찮으시니까 손주가 있어야 하고 건강하니까 심심하지 않게 손주가 있어야 한다니 이러나저러나 며느리는 손주를 낳기 위한 존재라고 생각하시는 걸까?
또한 그들이 그토록 손주라는 이름으로 원하는 생명의 존재는 누군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의 마지막 소원이기 위해서 태어났지만 막상 태어나보니 당신을 원하는 이가 세상에 없다면 그 길로 당신의 존재 이유는 사라지는 것일까? 아마 당신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당신은 당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결혼한 며느리이자 누군가의 아내이자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여성의 몸을 가진 나. 하지만 나는 아내, 며느리, 여성이기 전에 나의 몸에 대한 권리를 가진 '나'로 존재한다. 나는 오직 출산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목적이 아니라 나로 존재하기 위해 이 세상에 있다면 아이의 존재도 목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한다.
아이들은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기 위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충분하기 위해 태어나는 존재여야 한다. 우리는 모두 목적을 위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녀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서 누구나 알 법한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공무원 같은 번듯한 직업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멋진 사회생활을 하면서 (돈 잘 버는) 좋은 사람을 만나서 일찍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야 한다. 이것이 삶의 순서이자 의무이며 이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정답이자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래서일까 너도나도 평범하게 살아보겠다며 엄청난 경쟁에 뛰어든다. 10대의 내가 전력질주해서 명문대 진학까지 달리고 20대의 나에게 대기업이나 공무원이 되는 길을 바통터치한다. 그리고 20대의 내가 또 열심히 달려서 주어진 과업을 달성하고 나면 30대의 나에게 결혼과 출산이라는 바통을 터치한다. 이렇게 긴 이어달리기를 미친 듯이 전력질주한다. 계주가 쓰러질 때까지.
어쩌면 이토록 숨 가쁜 이어달리기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적인 분위기들이 이상한 말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모두가 정답과 의무라고 정해둔 틀 속에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부모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고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서 아이를 출산해야 하고 결혼했으니까 임신과 출산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세상.
하지만 이런 세상 속에서도 분명 누군가는 넘어지고 누군가는 다른 길로 가고 누군가는 이어달리기가 아니라 걸어가기를 선택한다. 인생을 이어달리기가 아니라 저마다의 지도를 가지고 다양한 목적지와 루트를 갖고 떠나는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미친 듯이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는 나 혼자만의 이어달리기가 아니라 때로는 느긋하게 걷고 때로는 사뿐히 뛰기도 하는 마라톤 같은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사는 삶을 부모님이 원하니까, 사회가 그렇게 하라고 시키니까라는 이유로 사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충분히 생각하고 자기와의 충분한 대화를 통해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누군가의 목적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도 충분한 존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