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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행 Nov 25. 2019

여행 중에 공부와 책읽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했을 때는 슬슬 여행의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역할분담도 어느 정도 되어가고 준이도 별 불평이 없었다. 

 새해 성수기라 호텔예약을 못해서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한국인 동네의 민박집에서 머물렀다. 이곳에서 이민을 준비하는 한국인 가족을 만났다. 강남에서 두 딸들의 대학입시를 성공리에 마치고 막내아들의 교육을 위해 말레이시아 이민을 선택했다고 했다. 이 가족의 어머니는 이제 한국에서도 국제적인 인재를 원한다 했다. 그래서 막내아들을 외국에서 교육시키다가 대학은 국내로 보낸다는 계획까지 세워 놓았다. 시대가 변해서 입시전략도 변해야 한다면서 입시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다. 세상물정 모른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겠지만 대학은 준이 스스로가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해서 질문할 내용이 별로 없었다.

학원은 실력을 보충할 필요가 있을 때나 보내는 거라고 말하던 나도 준이가 무아지경으로 게임만 하고 있으면 불안하고 성적표를 보면 초조해지는 점을 부인하기가 어려웠다. 아이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소위 명문 대학에 가길 바라는 마음을 접기도 힘들었다. 이렇게 모순의 연속을 헤매다가 여행을 마칠 때쯤에 중요한 건 대학이 아니라 고민 속에서 얻어낸 자신의 삶을 사는 거라는 생각에 어렵게 도달했다. 머리로야 벌써 알고 있었지만 진심으로 이런 결론에 이르기는 어려웠다. 그건 준이의 미래를 걱정한다기보다 내 욕망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대학을 포함해서 자신이 살 길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계속 찾아가야 하는 것 같다. 마흔 살인 나도 내가 뭘 하고 싶은 지 잘 모르겠는데 십 대인 우리 아들은 앞으로 부딪쳐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을까. 준이가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응원해 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리라.     

 과도한 공부 강요는 독이지만 제 학년에 갖춰야 할 학력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여행 중에도 준이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전과를 가져갈까 했는데 너무 무겁고 그 해에 교과서가 바뀐다는 정보도 있어서 한국 책 몇 권이랑 얇은 수학문제집 하나만 챙겼다. 수학문제집은 필리핀에서 한 달 동안 다 풀어서 너무 얇은 걸 가져왔나 후회했다. 외국에서 사려니 교과과정이 달라서 마땅한 문제집이 없었다. 결국 수학이랑 다른 과목은 한국에 돌아가서 공부하기로 하고 영어공부와 글쓰기만 하기로 했는데 규칙적인 공부시간을 내는 게 힘들었다.

 런던처럼 한 곳에 머물 땐 가능했지만 매일 돌아다니는 생활에선 책 읽히는 것만도 벅찼다.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 왔을 땐 공부를 시키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결국 잔소리 속에 글쓰기는 작문 몇 개로 끝나고 일기도 가뭄에 콩 나듯 썼다. 

 영어는 조금 성과가 있었다. 단어 몇 개만 알다가 어느 정도 말귀를 알아듣고 간단한 의사표현을 할 정도의 성과였다. 필리핀과 영국에서 각각 한 달씩 영어공부를 했고 영어책들을 사서 읽고, 렌터카 여행을 할 땐 차안에서 영어 동영상을 보았다. 가장 도움이 된 건 가이드들에게서 듣는 영어였다. 여러 나라의 가이드들에게 다양한 발음으로 영어를 들으니 귀가 단련되는 것을 느꼈다. 

 준이의 영어공부에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일등공신은 닌텐도 게임기다. 심심할까봐 가져간 닌텐도의 게임을 다 섭렵하고 마지막 남은 영어듣기 게임까지 하게 됐다. 지치지도 않고 무려 6개월에 걸쳐 영어듣기 게임까지 마스터하다니 게임에 대한 놀라운 열정이 느껴지는 아이다.

 여행 직후엔 영어실력이 제법 늘어서 본인도 뿌듯해 했다. 그러나 그 후에 방치로 인하여 영어는 시험을 위해 공부해야 하는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 되어 버렸다.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더니 준이는 길에서 그림 선생님들도 만났다. 아프리카 오버 랜드 투어에서 만났던 무신은 길에서 만난 준이의 첫 번째 선생님이었다. 준이는 미대생인 무신이 형이 스케치북에 그림 그리는 게 멋있어 보였나 보다. 동물을 그려서 무신이 형한테 보여주기도 하고 형의 그림을 따라 그리기도 했다. 나중엔 조그만 수첩을 사서 여행 틈틈이 동물이나 여행지를 그렸다. 

 터키 동부 투어에서 만난 호주 할머니에게도 준이는 그림을 배웠다. 호주할머니는 힘들이지 않고 노트에 동물 그림을 척척 그렸다. 알고 보니 미술 선생님이었다고 했다. 긴 승차시간의 지루함을 달래던 미술 수업 시간이었다.


자유롭게 책 보고 게임도 할 수 있는 아이슬란드의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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