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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행 Nov 25. 2019

긴 여행 준비하기

초등생 데리고 가는 여행 준비

여행을 준비하다  

‘진짜 한번 가볼까?’하는 생각은 결심으로 바뀌고 여행 준비에 들어갔다.

일단, 같이 여행을 할 당사자인 아들 준이. 세계여행 가자고 하면 좋아라고 춤이라도 출 줄 알았는데   “안 가면 안 돼?”가  첫 대답이었다. 온갖 설득 중에서 일 년 동안 학교 안 다녀도 된다는 말에    솔깃하더니, 지금 친구들하고 헤어지기 싫으니까 4학년이 끝나면 가자고 했다. 그러다 점점 엄마,  아빠의 감언이설에 녹아들어 가 준이도 여행을 꿈꾸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변에 우리의 계획을 조금씩 알렸다. 친구들 대부분은 무슨 황당한 소리냐는 반응이었고 자신들도 떠나고 싶지만 여자들은 남편 때문에, 남자들은 아내 때문에 엄두도 못 낸다고 했다. 부럽다고 하면서도 내심, 애까지 딸린 부부가 돌아와서 어떻게 사는지 보자는 심산들도 내비쳤다.   

친구들이야 뭐래도 괜찮았지만 가장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운 대상은 바로 가족들이었다.

설날에 세배할 때 ‘올해도 작년처럼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덕담을 건네셨던 친정엄마가 가장 강하게 반대했다.

 “나도 다른 집 딸이 간다면 장하다며 선뜻 잘 다녀오라고 할 수 있다. 근데 내 딸이 간다는데 쉽게 갔다 오란 말이 나오겠니?”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다.

시어머니는 점집에서 운수대길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근심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하다가 아들과의 긴 대화를 한 후에야 허락했다. 허락을 안 해도 아들의 고집을 꺾진 못하겠다고 판단해서 포기한 것 같았다. 그저 건강하게 다녀오라는 긴긴 당부가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동서에겐 아버님 제사라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하면서 살짝 미안했다.     

긴 여행을 가고 싶은데 가족이 걱정돼서 못 간다는 사람을 위해 여행 10개월 때, 다이어리에 썼던 내용을 인용해 본다.     

 여행 10개월째 터키 여행 끝 무렵에 쓴 내 메모 :

벌써 여행 나온 지 10개월이 되어 간다.

여행을 시작했을 때 가족들은 우릴 걱정했지만 맏딸, 맏아들이라 우린 부모님이 걱정이었다.

지금쯤 아버지는 서투른 인터넷 실력으로 우리 블로그에 매일 들어올 테고 엄마는 우리의 무사 귀환을 위해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할 거다. 시어머니는 든든한 큰 아들이 없어서 허전해하고 있을 거다. (돌아와서 들으니 어머니는 큰 아들 없을 때 죽으면 안 된다고 운전도 안 했다고 한다.)

‘잘 있다. 걱정 마라, 건강해라’라는 문자메시지가 띄엄띄엄 오고 가는 사이에 가족들 한 명 한 명의 생일이 지나가고, 일 년 중 가장 큰 행사인 아버님 제사가 지나고 명절도 별 탈 없이 지나갔다.

고3인 큰 조카는 수험생 생활을 치열하게 보내고 있는 것 같고 다른 아이들도 학교 잘 다니고 있었다. 가족끼리 모였는데 우리 없어서 심심했다는 소식을 받고는 내심 기뻤지만 재밌게 지냈다는 것을 우리도 안다.

가끔씩 블로그에 회사 동료가 직장 소식을 전해주고 친구들은 ‘너희처럼 살아야 하는데 부럽다’는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돌아올 때쯤 되니까 만감이 교차하지?’ 하며 슬쩍 약 올리기도 하고 돌아오면 술 한 잔 하자는 약속을 잊지 않는다.

결론은, 우리가 없는 일 년 동안 다 잘살고 있더라는 것.

나 없으면 큰일 날 것 같지만 나 없어도 다 잘 산다. 자신이 집안의 기둥이고 나 없으면 직장과 대한민국이 안 돌아갈까 봐 긴 여행은 못 한다는 친구들에게 우린 과감하게 세계여행을 권한다.     

 가족들을 설득하면서 구체적인 여행 계획에 들어가자니 막막했다.

 책과 인터넷을 뒤지고 여행사들도 찾아다녔지만, 우리처럼 아이를 데리고 가는 여행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정보에 목말라 헤매던 중에 어느 여행사에서 우선 여행의 목적을 분명히 하라는 충고를 들었다. 여행 목적을 분명히 해야 돌아왔을 때 후회가 적다고.

 여행의 목적과 구체적인 경비 등 고려할 점이 많은데 난 그저 여행 장소만 찾아보았던 것을 반성했다. 돌아온 후 준이의 교육과 우리 부부의 직장 문제를 생각해야 했고 여행경비와 여행 기간 동안 벌지 못하는 수입까지 생각하면 세계여행을 통해서 이 비용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 와야 했다.

우린 어떤 여행을 하고 싶은 걸까?

셋이서 각자 여행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 내려갔다.

나는 우선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준이에게 세상 이곳저곳을 보여주고 싶다. 낯선 곳에서 잠깐이라도 살아보고 싶다. 외국 요리도 배우고 싶고 새로운 친구들도 만나고 싶다. 오랑우탄 서식지와 활화산이 있는 곳에도 가보고 싶다.’로 내 목록이 가장 길었다.

 준이는 세상에서 가장 큰 수족관과 덴마크의 레고 랜드에 가고 싶다고 했다. 인터넷에서 검색된 세계 5대 수족관을 계획에 넣었다. 그러나 여행을 다니다 보니 세계 몇 대라는 건 주관적인 설정이라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조지아 아쿠아리움만 챙겨 보았다.

레고 랜드 역시 실제 여행에선 빠졌다. 여행하면서 준이의 관심사가 레고보다는 동물 쪽으로 바뀌었고 경로를 짜다 보니 덴마크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편의 여행 목적은 미지의 세계와 비즈니스에 관련된 곳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돌아와서 일을 할 때 참고가 되도록 우리나라엔 없는 사업 아이템을 찾아보고 싶다고 했다. 미지의 세계는 우리가 사는 도시와는 분위기가 다른 아프리카나 남미 정도로 해석하고 루트를 짰다.

남편이 생각했던 비즈니스.

가족 전체가 긴 시간을 여행한다면 돌아와서의 생계문제는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관계된 곳을 중점적으로 돌아보거나 한국엔 소개되지 않은 사업 아이템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벤치마킹이라는 이유로 일부러 해외출장을 가기도 하는데 여행이라는 좋은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동반하는 점도 여행 경로에 당연히 반영돼야 한다. 아이가 어리면 바닷가나 산 등 뛰어놀면서 쉴 수도 있는 곳이 좋다. 교육에 욕심을 내서 박물관이나 미술관 위주로 돌면 아이들 입장에서는 힘들고 지루할 따름이다. 많이 다니다 보면 그게 그거라는 식으로 식상해지기도 한다. 우리도 처음엔 가는 나라마다 과학관을 열심히 찾아다녔는데 나중엔 플라스틱 공룡 모형만 봐도 넌더리가 났다.

 어떤 사람들은 비행기 타는 루트에 지구의 자전 방향을 고려해야 피곤함을 줄일 수 있다고도 하는데 그런 점까지 고려하기엔 너무 피곤했다.

 이러다 보니 일 년 가지곤 어림도 없어 보였다. 말이 ‘세계여행’이지 일 년 동안 세계를 다 둘러보는 건 불가능하다.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을 짜임새 있게 일 년이라는 시간에 넣어야 했다. 어떤 것을 원하느냐에 따라 루트가 달라지고 경로와 시간에 따라 만나는 사람과 사건이 달라진다.

고심 끝에 세운 첫 번째 원칙은 ‘각자 보고 싶은 걸 우선적으로 계획에 넣고 아프리카나 남미처럼 평소에 가보기 힘든 곳 위주로 둘러보자.’였다.

‘짐의 무게와 캠핑을 생각해서 여름을 따라서 움직이고 아이가 있으니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도 큰 원칙으로 정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필리핀(한 달간 어학연수) - 아프리카- 남미- 미국 - 유럽- 중동 - 아시아를 돌아보는 루트로 결정했다.

실제로 여행을 하면서 여러 가지 변동이 있었다. 처음에는 20개국 정도 계획했지만 돌아와서 세어보니 33개국이나 다녀왔다. 비행기를 탄 횟수만도 일 년 동안 38번이나 됐다.

중요한 건, 몇 개국을 가든지 재밌게, 가고 싶은 데 가고 먹고 싶은 거 먹으면서 알뜰하게(?) 다니는 거다.  100% 완수했다고 장담은 못하지만 나름대로 즐거웠다.

사표를 내고 살던 집을 정리했다.

살림살이 대부분은 아는 분 창고에, 나머지는 친정에 맡겨놓고 책은 친구에게 일 년간 장기대출을 했다.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이 일이 실제로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여건이 허락되면 살던 집에 살림살이는 그대로 놓고 천으로 덮든지 가끔씩 지인에게 관리를 부탁하는 게 훨씬 수월할 것 같다.     

 가족 여행자의 특이사항이 바로 아이의 학교 문제다. 먼저 준이의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교사생활 동안 어학연수 가는 학생들은 많이 봤어도 세계여행 가는 학생은 처음이라면서 신기해했다. 여행도 공부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제출서류를 알려 주었다. 1년 이상 휴학할 때는 여행계획서와 주민등록등본을 학교에 제출하고 돌아와서 여행보고서를 작성하고 간단한 시험을 보면 된다고 했다. 가끔씩 외국에 간다 하고 잠적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출국을 하면 학교에서 출입국관리기록을 확인한다고 한다. 초등학생의 경우, 휴학 여부는 학교장의 재량이라 학교마다 다를 수가 있기 때문에 선생님과의 상담은 꼭 필요하다.

준이는 초등학교 4학년 11월에 여행을 떠나 일 년 만에 복학해서 5학년은 2주만 다니고 6학년이 되었다. 실질적으로 5학년 과정을 건너뛰었는데 이 문제는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하는 것이 없어 보여도 실제로 배우는 것이 많다. 그 공백을 메우기가 쉽지 않아서 장기여행을 다녀온 아이들 중엔 여행 전 학년으로 돌아가는 아이도 있다. 준이는 친구들보다 한 학년이 낮아지는 게 싫다고 해서 바로 6학년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여행 다니면서 학교는 어떻게 했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학생처럼 ‘휴학했어요.’라고 대답했다.

건강문제도 미리 체크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 우리의 여행 소식을 듣고 의사 친구가 건강검진을 강력히 주장했다. 여행 중간에 아파서 돌아오는 낭패를 막기 위해 우리 부부는 건강검진을 받고 준이랑 셋이서 치과치료도 받았다.

간단한 상비약을 준비하고 감기에 걸리면 늘 편도선이 붓는 나는 이비인후과에서 받은 약을 따로 챙겼다. 의사 친구는 처방전을 곁들인 비상약을 종류별로 챙겨주었다. 이 약들을 칸칸이 구분된 상자에 넣고 다녔는데 여행 중엔 정작 우리 가족보다는 다른 친구들한테 유용한 경우가 더 많았다.

아프리카를 가려면 필수인 황열병 예방주사를 맞는 김에 준이의 소아 수첩을 꺼내 예방접종을 확인해 봤더니 바쁘다는 핑계로 6살 이후에 추가접종을 하나도 안 시켰다. 부랴부랴 간염에, 소아마비에, 장티푸스까지 밀린 예방접종을 시켰다. 여기에 파상풍, 광견병 예방접종까지 추가했으니 불쌍한 준이는 2주 동안 팔에 구멍이 나도록 예방주사를 맞아야 했다.

챙길 건 챙기는 대로, 부실하면 부실한 대로의 여행 준비가 거의 끝나고 떠날 날이 다가왔다. 출발 전에 한번 보자고 만난 친구들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떠난다고 듣긴 했어도 진짜로 갈 줄은 몰랐다고 했다. 20대 초반도 아니고 잠깐 한눈팔면 당장 생계가 막막해지는 이 나라에 살면서 참 겁도 없다고 했다.

친구들. 우리도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이건 마흔이 되는 동갑내기 우리 부부의 인생 상반기 결산이라는 의미 있는 여행이라네. 둘 다 건강한데 돌아와서 살 길이 없겠나? 호기를 부리며 만남마다 같은 멘트를 날리곤 했는데 딱 한 명의 친구는 언젠간 내가 떠날 줄 알았다고 했다. 나도 몰랐던(아니면 잊고 있었을) 내 방랑 기질을 그 친구는 간파하고 있었나 보다.      

떠날 날이 다가올수록 ‘준이 보고 싶어 어쩌느냐.’는 ‘전국 준이 팬클럽 회장’인 친정아버지의 원망 어린 한숨이 커져갔다. 핸드폰을 가져가지만 급할 때만 쓸 예정이고 노트북을 가져가서 인터넷 통화도 가끔씩 할 거지만 우리가 잘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여행 블로그를 만들었다.

동사무소 문화센터에서 인터넷을 배우기 시작한 아버지를 위해 블로그 들어오는 법을 차례대로 적어 컴퓨터 옆에 붙여주는데 왠지 코끝이 찡해왔다.      

커다란 배낭을 나란히 메고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결국 친정엄마는 딸이 아닌 사위를 붙잡고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평소에 사위한테 심적으로 많이 의지했나 보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속담처럼 하나 있는 딸 가족의 난 자리는 무척 크게 느껴졌으리라.

가족들과 인사를 마치고 필리핀행 비행기에 올랐다. 수십 번의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다이어리에 적었다.

 준이 : 기대된다. 이제 정말 가는구나.

 나 : 준비하는 거랑 진짜 출발하는 거랑은 다르구나.

 남편 : 일 년 뒤에 살 빠진 모습이 기대된다. (애석하게도, 일 년 후에 더 쪘다.)

약간의 긴장과 흥분, 들뜸 속에 우리가 탄 비행기는 악천후로 심하게 흔들리면서 필리핀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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