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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Oct 09. 2022

환갑 즈음에

미래 일기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틀어놓고 밤새 맥주를 마시며 흐느낄 정도로 난리를 쳐댔던 나는 어느새 환갑이 되었다. 더운 물로 샤워를 하고 호피무늬 실크 블라우스와 발목이 드러나는 블루진에 펌프스를 신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서울패션위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날이다.


우연한 기회에 시니어 모델로 활동하게 되었다. 젊은 날엔 비운의 짧은 기럭지와 어마무시한 식탐으로 꿈도 못 꿨지만, 시니어 모델은 무엇보다 분위기와 개성이 중요했다. 영원히 늙지 않는 피터팬이라 불리던 나는 여전히 이십대의 도도함과 몽환적인 눈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쿵쾅대는 크고 웅장한 음악이 흐르고, 첫 모델이 나갔다. 몇 초 뒤 걸어 나가는데, 곁눈으로 사람들이 보였다. 시선이 집중된 게 느껴지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카메라를 잡아먹을 듯한 표정을 짓고 수없이 연습한 워킹으로 힘차게 걸어 나갔다. 무대 중앙에 서서 손을 허리에 올리며 관객들과 눈을 맞추고 왼쪽 한번, 다시 오른쪽으로 한번 포즈를 하고 턴을 돌아 나오는데, 순간 전기가 오르듯 만족스러운 소름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여기저기서 작은 탄성이 들렸다. 쇼가 끝난 후 무대 뒤에서 옷을 갈아입고 편안히 의자에 앉아 뒷목을 기댔다. 뿌듯했다.



40대나는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었다.

'이 나이 먹고도 꿈을 꿔도 되나? 이 나이엔 계속 떨어지는 체력의 마지노선이나 지켜가면서  그냥 안정적으로 월급 따박따박 받고 사는 게 최고 아닌가.'

남들이 다 비웃을 것만 같았고 뭘 해도 될 것 같지가 않았다.


늙었다는 자각, 이룬 것 없는 패배감, 지난 삶에 대한 부끄러움, 타인과의 비교를 버리자 죽음으로  걸어가던  길이 삶의 길로 바뀌었다. 소멸된 줄 알았던 꿈들도 다시 다가왔다.

     

시니어 모델을 하며 겸하게 된 부업은 ‘시니어 이미지메이킹’ 강사이다. 쇼핑중독과 모델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코디 방법, 호감을 주는 이미지, 자신감에 대한 영감을 주고 있다. 반응이 좋아 경기권의 노인복지센터에 꾸준히 출강하고 있다.      


오늘은 강의가 없는 날이라 봐두었던 컵을 찾으러 공방에 갔다. 커피향이 감도는 그 곳에는 쏟아지는 햇살 아래 단아하게 앉아 긴 목을 숙인 채 뭔가에 집중하는 오랜 인연의 선생님이 있다. 조용히 다가가 툭 치니 특유의 놀란 사슴 눈을 하고 쳐다본다. 컵을 보기만 해도 로마의 콜로세움과 트레비 분수를 여행하는 기분이 되었다. 이 컵을 소재로 수필을 써야겠다.   

   

출판사 문학동네를 통해 이미 한 권의 수필을 냈고, 한 권의 계약이 더 남아 있다. 그것도 거의 완성되어 이제 엮기만 하면 된다. 늘 환갑 이후에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단편소설부터 천천히 시작하면 된다. 아직 꿈꿀 게 남아 있어 행복하다.       


나를 온전히 믿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림책 ‘뛰어라, 메뚜기’에서 두려움에 오랜 시간 잎사귀 뒤에 숨어 지내던 메뚜기가 덤벼드는 뱀과 사마귀를 뿌리치고 하늘 높이 뛰어오른 것처럼 말이다.     

 

퇴근한 남편과 동네 카페에 가서 아메리카노와 허니브레드, 와플을 시켰다. 남편은 벌써 삼십 년 넘게 한 회사에 근속중이다. 만약 성실함이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바로 그일 것이다. 오래전 암에 걸렸지만, 꾸준히 운동하고 관리하여 완전히 극복했다.      


처음 남편을 만난 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까지 한 소개팅 중에 못생긴 걸로 원탑이야. 어떻게 저렇게 생긴 사람을 소개시켜줄 수가 있어? 날 뭘로 보고~.”

그런데, 점점 잘생겨지더니 환갑이 넘자 미모에 물이 올랐다. 큰 키에 평생 거르지 않고 헬스장을 다닌 날씬한 몸과 두꺼운 팔뚝, 크고 곧은 콧대, 새치염색을 포기한 은발머리는 멋스러움을 더해준다.        


커피를 마시며 다음 달 있을 조카의 결혼식에 멋있게 칼정장을 입고 가라고 하니 남편이 말했다.

“그냥 칼을 차고 가야겠네.”

다소 레벨은 낮지만 유머도 조금씩 는다. 남편과 하천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개를 들어 까만 하늘을 올려다봤다. 언젠부턴가 젊은 날에도 봤던, 마치 우주복을 입은 아기같이 소담하고 또렷한 별이 여전히 저기 있다. 저 별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준 것 같다. 오늘도 퍽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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