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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Nov 02. 2022

달빛 아래 두 사람

<그림출처 ; 다음, 위키디피아, 월하정인>

늦은 밤, 기와집을 둘러싼 낡은 벽돌담 길 모퉁이에 두 남녀가 서 있다. 구름을 헤치고 꼿꼿이 얼굴을 드러내던 달도 이제는 지쳐 누워있는 깊은 밤이다. 오직 두 남녀만이 생기를 띄고 거기 서 있다.


갓을  남자는 그녀 앞을 비추는 등을 들고 잔뜩 애가 타서 그녀를 재촉한다. 이미 발끝은 왼쪽으로 틀어져 힘차게 튀어 나가려 하고, 왼쪽 옷소매에 주렁진 주름을 보니, 팔도 뻗어나가기 직전이다. 그녀가 뒤집어쓴 보자기 사이로 달빛보다 새하얀 얼굴이 언뜻언뜻 보인다. 낮에 본 그녀가 맞는지 신비롭게 빛나는 안색에 가슴이 더 세차게 뛴다. 고요한 달이 내려다보는데 이래도 되는가 싶기도 죄를 짓고 있나 싶기도 하다.



남자는 살면서 한 번도 이렇게 애가 타 본 적이 없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선비의 체통 따위 벗어던져 버린 지 오래다. 나만 이렇게 애가 타고 저 여자는 한 치의 미동도 없는 게 나를 놀리는가 싶어 얄미우면서도 더욱 우러르게 된다. 낮에 나를 향해 보인 웃음과 건네 온 말들, 내 팔을 지그시 누르던 것을 잘 못 알아들은 것인가. 내게만 보낸 신호가 아니라 그저 누구에게나 하는 아양이었던가. 그래도 나는 이 여자가 어렵다. 떠오르는 오만가지 생각 중에서도 날이 샐까 두려운 맘 한 자락 때문에 결국 조급하게 말을 꺼냈다.

“낭자, 저 쪽에 내가 봐 둔 정자가 있소. 그만 거기로 갑시다.”





‘기생오래비같이 생겼네. ’

매끈한 얼굴에 외까풀진 눈, 웃을 때 들어가는 보조개가 매력적이다. 쫙 펴진 넓은 어깨에 날렵한 몸이 도포자락으로도 감출 수가 없다. 낮에 나를 향해 웃는 이 남자를 보고 숨이 막힐 뻔했다. 마치 태양이 다가오는 듯했다. 목소리는 또 얼마나 근사한지.


그러나 전에도 이 담벼락에 몇 번 서 봤던 여자는 남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본다. 이전 남자는 나를 몇 달간 정자로 데려가다가, 말도 없이 양갓집 규수에게 장가를 갔다. 오래전 일이지만 혼자 여기 서 있던 기억이 너무나 쓰라리다.


순수한 열정이 아직 밑바닥에 있지만, 접히고 긁힌 상처들이 켜켜이 내리누르고 있어 선뜻 봉인을 해제할 수가 없다. 이 남자를 시험하고 싶다. 지쳐서 그가 떠날까 두렵지만, 지금은 따라나서고 싶지 않다.  

‘이 남자는 믿을만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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