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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Nov 18. 2022

등산_셋째 날

얼마  가서 벤치에 털썩 앉았다. 가방을 열어 두유를 꺼냈다. 어릴 적엔 비싸서 자주 못 먹던 음료였다. 삼백 원쯤 했으니 당시 물가를 고려하면 싼 편이 아니었다.     


두유를 보니 국민학교 때 우유급식이 생각난다.  평일 우유가 나왔고, 토요일엔 요거트가 나왔는데, 평일만 신청해서 먹었다. 그때는 의무교육에도 돈이 많이 들었다. 고등학교까지 자매의 육성회비를 대느라 엄마의 허리는 늘 휘었다.           


달큼하게 절여진 딸기가 큼직하게 떠있던 요거트를 옆자리 남자애가 흰색 플라스틱 수저로 떠서 먹는 것을 쳐다보며 군침만 흘렸다. 어느 날, 장난치듯 뺏어 먹었는데, 그날부터 자기는 단 걸 별로 안 좋아한다며 매번 양보해주었다. 그 나이에 단 걸 안 좋아한다는 퍼센트 나를 배려한 하얀 거짓말이었다. 겨울 호빵같이 따뜻한 기억에 손발에 힘이 생긴다. 남은 두유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신 후 가방에 넣고 다시 길을 나선다.          




한 집에 한 명씩은 있는 것 같은데, 우리 집 빌런은 이모다. 큰 이모 둘째 아들의 결혼식이 내일이다. 소식을 듣자마자 엄마에게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더니, 나무라시길래 나도 성을 다.

         

“엄마, 나는 큰 이모가 정말 싫어. 엄마 속상할까 봐 한 번도 얘기한 적 없는데, 큰 이모가 얼마나 무시했는지 알아? 큰 이모 개업식 때 말이야. 작은 이모랑 나랑 앞치마 두르고 떡이랑 고기랑 차려서 나르는데, 점심때쯤 큰 이모 시댁 쪽에서 온 거야. 시조카였던가? 내 또래더라고. 암튼 걔가 와서 상을 차려줬더니, 한다는 말이 맛없어 안 먹겠다는 거야. 그랬더니 큰 이모부가 바로 걔 데리고 나가서 밥 사 멕이고 오더라고. 난 떡 쪼가리 주워 먹으면서 한시도 못 앉 서빙하고 상 치우고 설거지하는데 말이야. 아주 시다바리 제대로 한 거지. 아, 그럴 거면 알바비라도 주던가.     

한 번은 뜬금없이 나한테 전화해서 자기 아들 연봉이 얼마라고 자랑을 하더니, 너는 얼마를 버냐는 거야. 무례한 질문이잖아. 그래서 ‘벌만큼 벌어.’ 그랬더니 뭐라는 줄 알아? ‘너 이백은 버니?’ 기가 막혀서. 나 그 때 백만원 벌 때거든. 엄마, 이런 얘기 밤새 해도 모잘라. 나는 큰 이모가 정말 싫어.”  


엄마는 다 듣고도,

그건 그거고 결혼식은 가야지. 니 큰 이모도 이제 옛날 같지 않아. 사람이 아주 유해졌어.”라고 다. 겉으로는 알았다고 했지만, 공감받지 못한 마음은 더욱 어깃장이 났다. 남편이 대상포진에 걸린 후부터 나라도 가야지 하는 생각과,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 사이에서 대치 중이다.           

  

산에 오르면서도 온통 그 생각뿐이다. 논어에도 미움을 버려야 한다는데 쉽지가 않다. 호흡을 길게 내쉬며 마음수련을 해본. 큰 이모와 연관된 따뜻한 기억을 떠올리려 애써보지만, 단 하나도 떠오르질 않는다. 결국 남편을 방패 삼아 안 가기로 맘을 굳힌다.


집에 있으면 해결되지 않을 고민이었다.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하면, 지금 하는 생각이 나에게 좋은 건지, 아닌지 알 수 있다. 가지 않기로 후부터 뭉쳤던 어깨가 풀리고 천근만근 같던 몸이 가벼워졌다. 마음이 즐거워지고 이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맨발로 걷는 사람이 옆으로 지나간다. 언뜻 보기에도 몸이 가볍고 피부가 맑아 보였다. 어떤 경지에 오르고 얼마나 두려움을 비워내 가능한 걸까. 깊이 존경심이 었다. 누군가 맨발을 밟을 것 같고 나뭇가지나 유리조각에 찔릴까 봐, 나는 못하겠다. 신발은 못 벗더라도 칭찬과 인정을 갈망하는 마음만은 벗어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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