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뤄두었던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를 보았다. 매기(힐러리 스웽크)는 용기 하나로 기회를 잡고 두려움 없이 걸어갔으며 인생과 복싱에 진심이었다. 시합 중 사고로 척추가 손상되어 다시는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쓰레기 같은 가족에게 외면당하고 결국 다리를 절단한 매기는 연명하는 삶을 그만 끝내주기를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부탁한다. 그는 매기를 소중한 내 혈육이라는 뜻의 ‘모쿠슈라’라고 불렀고, 딸 그 이상이었다. 힘든 프랭키에게 오랜 친구인 스크랩(모건 프리먼)은 말한다. 아마도 마지막 순간 여한없이, 후회 없이 살았다 할 거라고.
오래전 그날, 시험에 실패하고 사랑을 잃고 방을 빼달라는 독촉을 받고 드라마를 보며 울었다. '태양의 여자' 속 고아인 여주는 입양 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일부러 버린 동생을 다시 만나게 되며 불안에 미쳐 날뛴다. 그녀의 불행이 내 것 같아 밤새 흐느낀 다음 날, 오래 앓던 감기를 떨친 듯 가벼웠다. 몸속에 있는 것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다. 샤워 후 옷을 갈아입고 볕이 잘 드는 방을 보러 나갔다.
팔다리는 멀쩡한데 자꾸 아프다. 뭐만 하려고 하면 대상포진에 걸리고 인대가 손상되고 지병인 디스크, 치질이 도진다. 치질은 합숙하던 첫 직장에서 불청객처럼 찾아왔다. 따뜻한 물로 좌욕 후, 만병통치약인 안티푸라민을 바르면 낫는다는 민간요법(검증안됨)을 알아냈다. 점호가 끝나면 몰래 침대를 빠져나와 길고 긴 복도 끝 화장실에서 물을 받아 아무도 모르게 좌욕을 했다. 그때 하필 지옥의 등산훈련이 있었다. 밑이 빠질 것 같은 고통에 괴로워하며 뒤처지자, 바로 적발되어 얼차려를 받았다. 산 중턱에서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어깨동무를 하고 뒤로 굴러 앞으로 굴러 구호와 함께 끝도 없이 나뒹굴었다. 흙을 옴팡 뒤집어쓴 그지꼴로 '미안해~' '괜찮아~너 치질이잖아~~' 함께 낄낄대며 마음만은 꺾이지 않았다.
걷기도 전에 뛰기부터하니 아픈 건 당연하다. 영화에서도 프랭키는 매기에게 걷는 법과 숨 쉬는 것부터 새로 가르친다. 무한정 반복하다 본능적으로 움직이게 되면 그제야 다음 단계로 이동한다.
누구한테든 마음을 기대 호흡기를 꽂고 연명하듯 살았다. 자신도 주체하기 힘들었던 이들은 내 무게에 눌려 도미노처럼 스러져갔다. 남은, 버려진 감정들이 흡수되어 섞였다. 탁한 물속을 헤맬 땐 물을 다 빼야 바닥을 볼 수 있다. 들여다본 밑바닥엔 마음이 어지럽게 뒤엉켜있었다. 한참을 응시하다 놓기로 한다. 영화를 보며 끝없는 눈물과 함께 전부 빠져나갔다. 다시 그날처럼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