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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May 16. 2023

오십 즈음에

미래 일기

바로크풍의 커다란 침대, 잘 말라 부스럭거리는 촉감의 새하얀 시트 위에서 눈을 떴다. 햇살을 안고 그대로 쏟아지는 하얗고 투명한 레이스 커튼이 생경하다. 여긴 암막커튼 덕에 낮인지 밤인지 모를 내 방이 아니다. 꿈인 듯 잠깐 눈을 비빈다. 오십이 되는 해에 비로소 로마에 가는 꿈을 이루었다.      


오늘은 뭐 하고 놀지? 옅은 미소를 띠며 벌떡 일어났다. 루틴대로 물을 한 잔 마시고 우아하게 스트레칭을 했다. 샤워 후 정성 들여 화장을 하고 흰 셔츠를 받쳐 입고, 통 넓은 검은 바지에 흰 운동화를 신는다. 그 위에 가죽 재킷을 툭 걸친다. 호텔을 나와 바람을 맞으며 성큼성큼 걷는다. 야외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쇼핑센터로 갈까 고민하다 트레비 분수로 향한다.      


사람 많은 걸 유달리 싫어해서 가까운 서울도 잘 나가지 않았다. 이곳은 텔레비전으로 볼 때마다 사람 반, 분수 반이라서 걱정이 됐다. 다행히 평일인 데다 이른 시각이라 한산하다. 카메라를 꺼내, 풍경에 맞는 렌즈로 갈아 끼우고 셔터를 눌렀다. 누군가 어깨를 툭 쳐서 보니, 카메라를 가리키며 찍어주겠다는 제스처를 한다. 매끈하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시원스러운 이목구비, 풍성한 검은 곱슬머리, 넓은 어깨를 조이는 셔츠 단추를 세 개나 풀어헤치고 검은색 슬랙스에 구두를 신은 남자가 나를 보고 웃는다. ‘잘생긴 남자가 말 걸면 무조건 소매치기라고, 누가 그랬는데.’ 이성이 잠깐 들어왔지만 설사 카메라를 잃는다 해도 거절할 수는 없다.  

    

그는 매력적인 미소를 한 다발 흘리며 한 손으로는 카메라를 들고 다른 손으로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시늉을 하며 코치했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어설프게 던지자 그가 외마디 감탄사를 하며 셔터를 눌렀다. 도망가면 쫓아갈 준비를 했지만, 남자는 카메라를 돌려주며 행운을 빈다고 말해주었다. 로마의 수호신 ‘유피테르’가 인간으로 내려온다면 아마도 저런 형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이 로마를 여행하는 모든 이들도 지켜주길 바라며 꿈결 같은 산책을 마쳤다.      


숙소로 돌아오니 남편은 막 운동을 마치고 올라와 땀에 절어있었다. 오전에 각자 자유시간을 가지니 참 좋다. 따로 또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결혼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샤워 후 꽃단장을 마친 남편과 피자를 먹으러 갔다. 명물인 화덕 피자는 쫄깃한 도우와 담백한 맛 덕분에 한없이 들어간다. 식사 후 로마 여행의 시작이라고 하는 콜로세오(Colosseo)로 향했다. 기원전 80년경, 무려 10만 명의 노예가 동원되어 지은 경기장이다.

“와, 내가 살아서 이걸 보다니.” 그제야 로마에 온 실감이 났다. 웅장한 건축물이 주는 위압감보다, 돌을 부수고 깎고 나르고 촘촘히 쌓았을 이들의 노고가 떠올라 저절로 압도되었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했다는 캄피돌리오 광장에서 계단을 내려와 왼쪽으로 조금 걸으면 ‘진실의 입’을 볼 수 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와 유명해진 이곳은 평일에도 줄이 길어 멀리서도 눈에 띈다. 줄 서는 걸 싫어해서 남편과 멀찍이서 보다가 오드리헵번처럼 커다란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오래 일몰을 바라보았다.  

     

어릴 땐, 한국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다. 신혼여행이 첫 해외여행이었다. 늦게나마 조금씩 영어를 공부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한 때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읊조렸던 나였다. 번번이 상처 입고 오래 힘들어했다. 마음의 장벽은 생각보다 두터워 스스로 가두었다. 체력을 쌓고 자꾸 밖으로 나오니 상처는 어디에나 있는 작은 돌부리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눈 뜰 수 있음에, 웅장하고 압도되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줌에 감사한다. 하루 종일 걷고도 아프다고 불평하지 않는 나의 다리에 감사한다. 혼자 가라고 했지만, 결국 함께 와준 남편에게 감사한다. 나는 며칠 후, 빨강머리 앤의 고향,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라는 작은 섬에 있을 것이다. 앤처럼 땋으려고 머리를 삼 년이나 길렀다. 나를 닮은 앤을 만나러 가야지. 여행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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