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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May 30. 2023

그대라는 사치

남편은 아프고 난 후 달라졌다. 운동복을 산다 해서 그러라 했는데 반팔 세트가 38만 원이라고 했다. 긴 팔도 아니고, 잘못 들었지 싶어 되묻고는 나도 모르게 말했다.

"미친 거 아냐?"

남편이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당장 내년에 죽을지도 몰라."

마음이 짠했다. 작년 일이고 지금은 아주 건강하지만, 그 말은 쇼핑치트키가 됐다.


결혼하고 백화점은 문턱 넘기조차 어려워했다. 코 앞인 신세계아울렛에 한 번인가 가서는 구경만 실컷 하고 '생각보다 싸지 않네. 다시 오지 말아야지.' 하고 빈손으로 나온 사람이다. 항상 인터넷 최저가 쇼핑에 흡족해하고, 반지갑 하나 사겠다고 백화점에 가서 진짜 백 바퀴를 돌아서 넌덜머리 나게 하던 사람이었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아울렛에 갔다. 남편은 택도 안 보고 입어본 옷을 결제하러 카운터 앞에 간다. 나이키 운동복과 항공점퍼까지 3개를 사고, 한 개 더 사면 15프로 세일이라는 점원의 말에 바로 십만 원이 훌쩍 넘는 얇디얇은 바람막이 점퍼를 가져와 계산대 위에 툭 올려놓는다.

다음 매장에 가서도 한치의 주저함 없이 한 벌을 피팅해 보더니 바로 입고 가겠다고 아예 택도 떼 달라한다. 집에 지천으로 널린 운동화도 비싼 걸로 집길래 보지도 않고 "사. 무조건 사." 그랬다.


차에서 보니, 아까부터 남편의 옆광대가 튀어나온 게 계속 웃고 있다.

"그렇게 좋아? 남편, 원래 옷 같은 거 별로 관심 없지 않았어?"

남편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껄껄 웃는다.

"총각 땐 무조건 신상, 비싼 것만 사고 그랬어. 와이프 만나고 참은 거지."

원래 사치스러운 인간이 그동안 인내했구나.


나는  만원도 안 이월상품 원피스 한 장 살 때도 한 달 즈음 고민한다. 백 개도 넘는 리뷰를 며칠에 걸쳐 하나하나 정독하고 머릿속으로 모델핏 말고 정직한 내 핏을 시뮬레이션한다. 노트북을 켜서 큰 화면으로 보고 또 보고 옷장을 열어 비슷한 스타일이 있는지까지 최종점검한 후에도 밤새 고민하다 '이거 안 사면 죽냐? 내일이 마지막날이라도 이걸 사겠냐.' 뭐 이철학적인 질문짜내맘을 다잡고 포기한다.


오늘 남편은 브라운색 카라니트티에 베이지색 린넨 통바지를 차려입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상이다. 나는 트레이닝 반바지에 바람막이 점퍼를 걸쳤다. 입으로는 멋있네 칭찬하면서도 한껏 멋 부린 그 옆에 자연인 자체인 내가 살짝 초라하게 느껴지려는 순간, 남편이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나 소개팅 좀 잡아줄래? 아무래도 소개팅 나가야겠어."

고개를 쳐들고 으시대는 폼이 아무리 농이라 해도 화가 난다.


어젯밤에도 수십 차례 결제창을 열었다가 '집에 옷 많은데...' 하며 잠을 청했다. 눈뜨자마자 마법의 주문을 외워본다.

"나도 언제 죽을지 몰라."

결제비번을 누른다. 아~~ 속이 다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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