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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Jun 02. 2023

심마니와 소개팅

카페에 앉아 이혜인 수녀의 시를 필사하다가, 이제는 멀어진 친구를 떠올렸다. '꽃씨를 닮은 마침표처럼' 시의 네 번째 행, '별 것 아닌 일로 마음이 꽁꽁 얼어붙었던 친구와 오랜만에 화해한 후의 그 티 없는 웃음으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친구가  말들 중 특히 아팠던  자기한테 이상한 남자들만 소개해줬다는 얘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이는 번호를 받고도 연락하지 않았고 또 다른 이는 만나기 전에 톡을 주고받다 연락을 끊었다. 만나서는 카페 문을 잡아주지 않은 매너 없는 이도 있었다 다.'그럴 줄 몰랐다, 정말 미안하다.'사죄도 십 년 전에 이미 많이 했는데, 도대체 몇 번째 원망을  건지. 인맥  하나 없는 내가,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얼마나 이리저리 뛰고 애썼는지  한  고려해주지 않은 친구가 서운했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사람은 심마니였다. 직업이 생소해서 몇 번이나 확인했다. 미리 받은 사진 속 그가 너무 잘생겨서 어느 정도 뽀샵일 거라 예상했다. 친구는 남자 친구의 친구들 중 제일 잘생겼고 실물도 사진 못지않다고 말했다. 나는 외모에 그다지 자신이 없었기에 백퍼 차일 거라는 걱정 기대를 동시에 안고 있었다. 카페에서 만나던 여느 소개팅 달리 는 대뜸 집 주소를 찍어달라고 했다. 당시 악명 높은 오르막길, 산을 깎아 만든 동네에 살던 나를 찾아오는데 꽤 애를 먹었을 것이다.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 내리막길을 걸어가는데, 저 멀리 작은 트럭 앞에 한 남자가 나한테 손짓을 했다. 잘 보니 빨리 오라는 손짓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하이힐을 신고 뛰다시피 그 앞으로 갔다. 목 늘어난 티셔츠에 여기저기 페인트가 튄 듯한 회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디 공사판에서 일하다 바로 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대충 입었다.

제대로 인사도 않고 차에 올라타라는 손짓을 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채 심호흡을 하고 트럭에 다리를 쫙 들어 올려 힘겹게 탔다. 나는 그의 굳은 옆얼굴을 훔쳐보며 '좌회전이요. 다음에 우회전이요.' 거듭 외쳐 단골 카페로 인도했다. 주차할 곳을 찾다가 한참 후 카페 2층으로 올라온 그와 드디어 마주 보게 되었다.


정신없어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숨을 고르며 찬찬히 보니 정말 잘생겼다. 산에서 찍은 사진에 뽀샵을 할리 없었다. 사진 속 모습 그대로 부드러우면서도 갸름한 얼굴에 풍성한 머리를 길러 웨이브 진 머리, 짙은 눈썹, 진한 쌍꺼풀에 움푹 들어간 소처럼 크고 맑은 눈, 버선처럼 오뚝한 콧날이 조각 같았다. 이렇게 생긴 사람과 이렇게 가까이 마주 본 적이 없었다. 후에 대학 때 별명이 베트남의 장동건이었다는 말을  듣고 수긍이 갔다. 출생지를 의심할 만큼 이목구비가 무시무시하게 뚜렷했다.


나만 그를 관찰한 게 아니라 내 눈 크기의 세배는 될 것 같은 큰  눈이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갈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다 어느 순간부터 미소를 띠었는데,  만면 가득 여유와 자연스러움이 흘러넘쳤다. 여지껏 본 적 없는 무드였다. 넘치는 체력과 남과 다르게 걸어온 길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었을까. 나는 마치 야생에서 두려워 떠는 토끼같이 긴장하고 있었다. 그동안의 소개팅과는 확연히 달랐다.


. 나는 얼빠였다. 왜인지 부끄러워 눈을 계속 볼 수가 없었다. 미모에 압도당한 상황이 당혹스러워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조용히 나를 응시하다가 한순간 말을 끊고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직업이야기, 아버지, 어머니(가족사진도 보여주었다),  러브스토리까지 풀어놓았다. 길어진 얘기에 조금 지루해질 무렵, 그는 내가 좋다며 사귀자고 말했다. 첫날에? 노빠꾸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홀린 듯 끄덕였다.


낮에 데이트한 적이 별로 없었다. 천안에 살던 그는 새벽 다섯 시가 되기 전에 입산을 했다. 새벽에 산삼이 잘 발견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종일  산을 뒤지며 산삼을 찾아 헤매밤이 되면 집 앞에 트럭을 끌고 왔다. 뒷칸에서 조심스럽게 싸 놓은 산삼을 꺼내 그 자리에서 생수로 흙을 씻어 내 입에 넣어주었다. 꼭꼭 씹어 뿌리까지 다 먹게 했다. 그를 만나고 나면, 다래끼도 낫고 감기도 낫고 온몸의 염증이 다 가라앉았다. 호프집에 마주 앉아 새벽녘의 공기와 피어오르는 안개, 굴러 떨어져 죽을 뻔한 이야기, 무덤 옆에서 마주친 흰 소복 입은 여자귀신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잘생긴 그도 좋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도 재밌었지만, 햇살아래 웃는 그와 마주 보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함께 걷고 싶었다.


카페 밖이 비올 듯 잔뜩 흐렸다가 다시 반짝 해가 떠서 눈부시다. 이제는 멀어진 친구가 소개해준, 한낮의 데이트라는 소박한 원을 품게 했던 그가 문득 떠오르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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