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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Jun 22. 2023

이빨 빠진 날

삼재가 분명하다. 전부터 안 좋은 몸뚱이가 올해 들어 계속 아프다. 1년 전부터 양치 중에 가끔 피가 났다. 스트레스 받아 그러겠지 넘기고, 병원에 가봐야지 하다가도 곧 바쁜 일상에 묻혔다. 일주일 전 고기를 씹을 때 아팠다. 너무 씹어 잠깐 부은 거겠지. 이러다 좋아지겠지. 뭐든 가벼이 웃어넘기고 낙관하는 성격이 발동했다.


컴활 시험공부와 엄마의 허리수술로 정신이 없어 계속 진통제를 사다 먹었다. 약국에서 찬 음식을  피하라 했지만, 몰아치는 일들에 스트레스를 받아 아이스커피와 아이스크림을 무진장 먹어댔다. 잇몸이 심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래도 그쪽으로 씹지만 않으면 아프지 않아서, 바늘로 톡 하고 터트리면 부기와 고름이 빠지지 않을까? 그럼 치과에 안 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궁리를 했다. 열흘을 넘기자 급기야 어금니 잇몸 주변이 크게 부풀어 올라 입천장 가까이까지 빵빵해졌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치과에 갔다. 기계로 사진을  찍고 간호사님이 입 안을 보고 눌러보시더니 너무 심각해서 이 병원에서 치료가 어려울 수도 있다 하셨다. 곧이어 의사 선생님이 오셔서 마지막 왔던 6년 전엔 잇몸상태가 좋았는데 어쩌다 이지경이 됐냐고 나무라신다. 전과 비교하며 보여주시더니 치아뼈가 다 녹았다 한다. 사진을 봐도 잘 모르겠다. 발치하고 임플란트를 해야 한다는 말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라미네이트요?"

놀라서 헛소리를 하니 선생님이 웃음을 참으며

"임플란트요." 하고 정정해 주신다. 맙소사. 생니를 뽑고 나사를 박아야 한다고? 아 이제 죽은니인가.

"발치를 해야 하나요?"

"언젠간 하셔야 할 건데~ 오늘 하실지 다음에 하실지는 결정하세요."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잠시 고민하다 여쭙자 빨리하는 게 좋다 하신다. 놀람에 이어 쓰나미 같은 절망이 몰려왔다. 염증제거로 어차피 무서운 마취주사를 맞아야 하는 김에 오늘 뽑기로 했다. 주사를 세 방이나 맞았다. 아프긴 했지만  허무할 정도로 찰나다. 이걸 그렇게 오래 두려워했다니.

  

다음 주 스케일링 약속을 잡았다. 잇몸치료도 몇 회에 걸쳐하고 충치치료도 해야 한단다. 추이를 지켜보다 약 4개월 후 잇몸뼈가 다시 차오르면 임플란트를 해야 한단다. 치과방문을 미룬 가장 큰 이유였던 통증은 막상 걱정거리도 아니었다. 앞으로 주야장천 펼쳐질 치과생활 및 치료비가 걱정이다. 발치한 치아를 덮어 주던  금니도 빛을 잃고 어둠에 싸여 처량 맞게 놓여 있다. 너도 참 고생 많았다. 치과 화장실에서 보니 얼굴이 팅팅 붓고 마취제 때문인지 한쪽 입꼬리가 처져서 입이 비뚤어졌다. 빠진 치아 사이로 꽉 끼워 물은 거즈가 영 불편하다.


폭염이다. 피를 많이 흘려 그런지 어지럽다. 문득 소설 '오발탄'의 주인공이 의사의 만류에도 충치를 모두 뽑고 택시에 올라 "가자!"만 반복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집에  돌아와 소파에 털썩 앉았다. 땀이 줄줄 흐른다. 잘못 쏘아진 탄환같은 기분으로 식을때까지 가만히 있는다.


벌 받은 기분이 든다. 결혼하고 5년 일하고 3년 동안 놀았다. 그 숱한 여유시간 동안 내 한 몸 돌보기조차 귀찮아한 대가를 이렇게 치르는 건가.


아니다. 아닐 것이다. 열심히 살았다고 상 주지 않았으니, 형평에 어긋난다. 그래. 그저 올게 온 거다. 올 게 왔으니 할 걸 해야지. 다시 기운 차리고 펀치를 날릴 수 있을 때까지 두들겨 맞다보면 다 지나갈 것이다.


무너진 치아는 무너진 일상을 거울처럼 비춘다.

 일인데 별 일이 아니라 우기며 게으름 속에 희석시켰다.

양치를 거른 채 스르르 잠에 들고, 매년 할 스케일링도, 충치치료도 미루었다. 매일 믹스커피를 네댓 잔씩 마시고 입도 헹구지 않았다. 과자, 아이스크림 등 인공의 맛을 실컷 즐기고도 이를 닦지 않은 업보는 그대로 치아에 흔적을 남겼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란 말이 이제야 실감 난다.


시어머니는 매일 일어나 이를 닦고 따뜻한 물 컵을 마신 후  아침을 드신다. 내게도 권했지만 시댁에서만 하는 행사다. 70세에 임플란트를 처음 하신 엄마는 얘길 듣고 노하셔서 일장연설을 하시다 결국

'우리 딸 먹는 거 엄칭이 좋아하는데 이가 그래서 어쩌누...' 하고 안타까워하신다.


해야 하는데 하지 않은 일은 죄책감에서 끝나지 않는다. 가상화폐가 아니라, 시간, 돈, 통증, 불편 등 실물화폐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게으름과 몇 개 없는 어금니를 맞바꾼 것처럼.

빈 공간에 혀를 넣어보니 휑하니 두세 개는 빠져나간 것 같아 마음이 쓰다. 원래 사람이든 치아 든 간에 빈자리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빈자리, 떠난 것, 잃어버린 것들은 지나간 사랑처럼 놓아주고 남은 치아에게 최선을 다하자. . 오늘도 반성, 다짐만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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