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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Jun 28. 2023

해야 할 일

지난주 월요일은 어금니를 뽑았고 수요일은 컴활 2급 필기시험을 보러 갔다. 사서로 이직하기 위해 필요할 것 같다. 여상 졸업 후 27년 만에 치는 컴퓨터 시험이다. 그  타자기에서 워드프로세서로 막 넘어가는 시기라 각 상고에서 재량껏 시험을 실시했다. 끝날 때쯤, 감독 선생님은 장트러블로 당황하시더니 이내 사라지셨고, 몇 분 추가된 시간에 힘입어 간신히 붙었다. 운칠기삼이던 추억을 떠올리며 도전한 컴활은 마치 외국어를 공부하듯 생소했고, 뇌가 점점 부어오르는 것 같았다.  


차분히 교재를 정독하다 어느 순간 '이래서는 죽도 밥도 안 되겠구나.'  감이 딱 왔다. 컴활 공부법을 검색한 후 'CBT 전자문제집'으로 6개년치 기출 문제와 답만 무작정 외웠다. 시험 당일, 오랜만에 설레는 기분으로 시험장인 안산상공회의소에 도착했다. 역시 나는 이런 긴장감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시험은 주문할 때 키오스크에 터치하듯, 화면 왼편의 문항을 읽고, 오른편 답지에 마우스로 클릭만 하면 답이 저장되는 식이었다. 종이 OMR카드, 컴퓨터용 사인펜도 이젠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목요일은 전 직장 동료들과 만나 광범위한 수다꽃을 피우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금요일은 몇 년간 보지 못했던 작은 이모와 내가 살던 동네에서 황톳길을 맨발로 걷고, 커피와 소금빵, 통밀빵을 먹으며 힐링했다. 보면 이렇게 좋은데 왜 그동안 미루었을까.


이번 주 월요일은 6년 만에 스케일링을 받았다. 가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너무 무서워. 지이잉~드릴 소리 너무 싫고 이 시리고 아으 엄청 아플 것 같아. 무서워~"

"아이고~겁낼 거 하나 없어~ 그냥,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내 몸은 부처님 것이니 마음대로 하소서~~ 그렇게 생각해 봐."

엄마는 수많은 종교를 거쳐 요즘 불교에 안착하셨다. 괜히 전화했단 생각을 하며, 아플 땐 행복한 생각을 하기로 했다. 아무 생각 떠오르지 않았고 치석을 파내는 드릴 같은 금속도구의 차가운 움직임에 온 신경이 쏠리고 몸이 굳어갔다. 긴장해서 담이 왔는지 목이 오른쪽으로 잘 돌아가지 않았다. 지쳐서 쉬고 싶었지만 한의원에 가니, 명의 선생님이 침을 놓고 부황을 뜨자마자 거짓말처럼 목이 홱 돌아갔다.


오전에 컴활 실기 공부를 위해 '국민내일배움카드'를 신청하고, 오후엔 한 달 넘게 해외여행을 떠났던 지인과 만났다. 항상 걷기를 장려하고 귀감이 되던 그녀는 여전히 건강한 모습이었다. 열 한시간 비행에 시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제 귀국해서 오전에 친정아버지를 뵙고 지금은 나를 만나러 왔다. 피곤한 기색 하나 없는 그녀처럼 활기찬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해야 할 일'이란 말 자체에 거부감이 있었다. 자유를 구속당하는 것 같아서 하고 싶고 당기는 일만 골라했다. 그러나 할 일을 하는 건 써그럭써그럭 굴러다니는 자갈 같은 마음속 불안을 사라지게 하는 일이었다. 매일 아침 양치를 하고, 스트레칭을 한다. 이때 커피를 마시거나 유튜브를 켜면 엉덩이를 떼지 못해 아주 망하는 지름길이다. 티브이를 끄고 일어나서 집 앞거나, 초록초록한 자연을 느끼고 싶다면 멀리 떨어진 옥구공원으로 걸어간다. 저녁에도 나와 걷다 뛰기를 반복하면 배가 홀쭉해지는 기분이다. 해야 할 일을 하니, 자주 꾸던 악몽도 잠잠해졌다.


더는 저질 체력으로 여행 메이트에게 누가 되고 싶지 않고, 혼자서도 어디든 다닐 수 있는 체력을 만들고 싶다. 누구앞에서도 꿇리지 않고 싶다. 돌이켜보면 정다웠던 이에게 상처받았다며 그르렁댄 순간은 가장 약해져 있을 때였다. 겁먹은 개가 크게 짖듯이, 약해지면 악해지는 것 같다. 오늘  쓰는 것을 비롯해서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기 확신을 갖는 것, 결과는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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