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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Jul 28. 2023

용기

그곳 수원

지난주부터 탈출을 시도했다. 천안은 계획한 거였다. 며칠치 짐을 싸서 천안에 들렀다가 계획 없이 다른 지역에 가고 싶었다. 첫 행선지가 천안인 건  그곳에서 오랜 절친과 다투멀어졌기 때문이다. 기억에서 빠져 나와 이제는 한숨 쉬지 않고 웃고 싶었다.


요즘은 실천하기 좀 어렵지만, 훌쩍 기차에 타서 아무 데나 경치 좋은 곳에서 내리는 버킷을 보고 싶었다. 천안역에 내려 빵집까지 걸어갔다.  먹고 나땡볕이 내리쬐는 시간대가 되었다. 병천순대 골목으로 이동(천안역과 병천리순대골목은 종점과 종점이다)했다. 근처에 있는 유관순 기념관을 잠시 둘러보고 순대국밥을 먹고 나니  졸음이 쏟아졌다. 그렇게 먹방만 찍다가 천안 역으로 왔다.

역 입구, 대형 에어컨 앞에잠시 고민했지만 줄줄 흐르는 땀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자마자 참외 하나 깎아먹고 어찌나 피곤했는지 거의 열두 시간 내리 잤다.


밤이 되니 정신이 맑아져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내일은 진짜 멀리 떠나야지. 기차표는 예약하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면 떠나고 혹여, 못 일어나면 다음에 가자고 여유롭게 생각했다. 여행이 숙제가 되면 안 되니까.



역시 일어나지 못했다. 8시쯤 일어나 짐을  간단히 챙겨 가까운 오이도역으로 갔다. 무조건 집을 나서야지 안 그럼 엉덩이 떼기 힘들어진다. 아무리 mbti  p라도 숙소랑 차편은 미리 예약하는 편이지만 혼행인지라 그 부담마저 훌훌 내던졌다. 오이도역 사회적 기업인 36.5도에서 시원한 라테를 먹으면서 노트를 펴고 계획을 적으려고 했다. 그런데 커피를 들이켜고 나니 이것도 시간낭비라는 생각에 조급해졌다. 계획은 가면서 세우자며 지하철을 타고 수원역에서 내렸다.


수원역은 첫 직장 때부터 애용하던 추억의 장소다. 고향인 대전에서 올라오면 역 앞에 통근버스가 나를 싣고 기흥 반도체로 데려다주었다.

이제 기차 시간표를 보고 어디든 떠나야 하는데 갑자기 배가 고팠다. 여기까지 왔는데, 딱 밥만 먹고 떠나자. 수원역 근처의 상무 초밥에 들어갔다.



거의 오픈런인데도 나처럼 혼밥 하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가성비 훌륭한 런치세트를 맛있게 먹은 후 검색해 보니 근처에 수원향교와 팔달문이 있다. 유적지를 사랑하는 나로선 지나칠 수가 없었다. 땡볕에 걸어간 향교는 야속하게도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헛걸음 후 내쳐 팔달문까지 이를 악물고 걸어갔다. 31°를 육박하는 날씨에 옷이 다 젖은 채 겨우 찾은 팔달문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그냥 시내 한가운데 떡하니 큰 성문이 달랑 있었다. 뒤쪽으로 긴 성곽이 있긴 했는데 거의  70° 가까운 경사에 포기했다. 지쳐버렸다. 멍청해질  정도로 너무 덥다.


수원향교(운영x)
팔달문


지하철이든 뭐든 간에 시원한 대중교통을 타야겠다 싶어 수원역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장마가 다 끝난 줄 알고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지나쳤던 반 고흐 카페가 생각났다. 머리에 손수건을 대고 마구 뛰어들어가 앉으니, 마치 시공간을 초월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별 볼 일 없는 작가가 밤에 종이 울리면 마차를 타고 1920년대로 돌아가 동경하던 예술가들과 친구가 되는 것처럼 비현실적이다. 소나기가 안내해 준 고흐 카페엔 벽화부터 액자, 진열된 파우치, 담요 등 물품, 컵과 쟁반, 컵받침까지 신비로울 정도로 정취가 가득다.


반고흐베이커리카페


집으로 돌아와 정신없이 에어컨을 켜고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너무 피곤하고 속도 울렁이고 무엇보다 두통이 심했다. 아무래도 더위를 먹은 거 같다. 그렇게 누워 하루 더 쉬었는데도 컨디션은 점점 바닥으로 가라앉 두통도 그대로다. 이러다 작년처럼 대상포진에 걸릴까 겁이 다.


다시 일을 시작하기 전, 쫓기듯 버킷을 다 하고 싶었나 보다. 너무 더운 날씨에 좌절돼서 슬펐던 거 같다. 물론 과제하듯 버킷을 실행하는 것도 썩 내키는 일은 아니며, 성실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도 정말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아니면 못하는 일,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대상포진에 또 걸린다면 골든타임 안에 달려가 항바이러스제를 맞으면 된다. 언제든 할 수 있는데, 굳이 지금 책 보고 걷기를 반복할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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