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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Jul 29. 2023

여수, 마지막

새벽녘에 눈을 떴다.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선크림을 발랐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푸석푸석 부었다. 충동적으로 강행한 일정이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고속버스로 여섯 시간을 달려 왔고, 다시 터미널에서 향일암까지 81개 정류장을 지나왔다. 일출시각은 5시 39분, 아직도 한참 남았다. 경험상 일출시각은 해가 떠오른 후고, 그전부터 있어야 제대로 된 해를 볼 수 있다. 엊저녁 답사한 바로는 꽤 난코스이니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에 커피 한 모금 얼른 마시고 일어났다.


오래된 펜션의 복도와 계단은 센서등이 없어 컴컴했다. 폰의 손전등 기능켜니 훨씬 낫다. 어촌은 새벽부터 조업에 북적일줄 알았는데, 인적 하나 없이 고요하다. 하늘을 보니 역시 우리 동네보다 별이 다. 사진에  담기지 않아 아쉽다. 큰 별 하나가 머리 위에서 마치 길잡이 노릇을 하듯 따라온.


비탈을  발자국 걷다 무섬증이 들어 뒤를 돌아보며 폰을 꼭 쥐고 구석구석을 비췄다. 고양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다음엔 불빛이 번쩍번쩍한 플래시를 챙겨야지.  계단씩 비추고 밟으며 조심스레 오른다. 간간히 켜진 가로등과 나의 거친 숨소리만 사방에 가득하다. 사람이 제일 무서운 시간. 걸음을 재촉하며 오르는데 저만치서 희미한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온몸의 긴장이 확 풀리고 안심이 된다.


계단을 다 오르니 비좁은 바위틈이 보인다. 안내판에 '해탈문'이라 쓰여 있다. 여기를 통과하면 해탈할  있다 하니, 믿을 수 없지만 속는 셈 치고 만 번이라도 오가 싶다. 몇 개의 바위틈을 지나고 또 몇 개의 계단을 올라 드디어 향일암에 도착했다. 

뒤로는 사찰이 있 앞으로는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낮에도 느꼈는데, 동해보다 남해가 더 하늘과 수평선의 경계가 희미한 것 같다. 검은 하늘에 서서히 붉은빛 서광이 비친다. 고즈넉한 목탁소리에 숨이 편안해지고 절로 손을 공손히 모은다.


잠시 정취를 만끽하려 했지만 여름 모기가 가만두질 않는다. 반바지 입은 다리를 죄다 헌납하더라도 방정맞게 모기 잡겠다 뛰댕길 수는 없다.  옆으로 몸을 흔들며 조용히 모기를 쫓았다. 다섯 시가 넘어가니 주위가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남자 둘이 두 번째로 올라오고 하나둘 사람들이 모였다. 오자마자 합장을 하며 시주를 하는 사람도 있고 젊은 커플은 서로 사진을 찍어준다. 조용한 분위기에 거의 수화로 대화하며 '앞에 서봐, 여기 봐봐', 나지막이 서로 속삭인다.


뒤편 계속 서 있던 이가 으로 왔다. 그제야 흘낏 보는데, 속을 알 수 없이 꼭 다문 입술과 강인한 턱, 선한 눈매가 꼭 스물여덟의 너 같다. 기분에 사로잡혀 정면을 응시했다.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저녁노을 같던 하늘이 어느새 대낮처럼 훤해졌다. 부끄러운 듯 붉은 얼굴을 한 해가 삐죽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여기저기서 , 카메라 셔터음이 나고 가만히 있던 옆자리 이도 그제야 주머니 든 폰을 꺼내 찍기 시작했다. 구름마저 로즈골드빛으로 물들어 반짝거린다. 구름   없는 맑은 날 보다 구름 낀날 일출이  멋스럽다  말이 맞았다. 사람도 완벽한 외모나 완벽주의보다 털털한 이가 매력 있듯, 자연스러울수록 자연은 빛난다. 아주머니가 내 귀 가까이 핸드폰을  내밀며 나를 옆으로 밀듯이 들어왔다. 웬만하면 비켜주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마지막이 때문이다.


바다를 향해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나는 여기 왜 왔을까. 관광도 아니고 오직 이곳을 찾기 위해  더운 날 나는 여기에  와야만 했을까. 지금껏 마지막 순간만 떠올렸다. 비감 꽂혀 있었다고 해야 할까.


처음 그날, 너는 쭈뼛거리며 눈도  쳐다보고 한마디 못 하고 연이어 들이킨 술이 턱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창피해 어쩔 줄 모르는 너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 킥킥 웃었다.

"괜찮냐. 술 못하네~ 집에 가라."


그렇게 웃으며 너의 등을 밀어 바다로 보낸다. 우리 처음 모습 그대로 파도 흘려보낸다. 합장을 하고 너의 평안을 위해 오래 기도한다. 해는 바다를 떠나 둥실 떠올랐다. 내려오는 길, 버린 짐도 없는데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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