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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Aug 04. 2023

라면

도서관 지하에 있는 카페 겸 매점에 갔다. 사장님은 언제나처럼  나를 쓰윽 보고 라떼드려요? 묻고는 계산도 안 하고 커피부터 제조한다. 컵에 얼음과 우유를 넣고 원두를 끼운 머신 위에 놓으면 추출된 에스프레소가 생명수처럼 조금씩 흘러나온다. 손이 빠르셔서 금방이지만 서서 기다리면 부담되실까 싶어 빈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본다.


더운 날씨 탓인지 평소 안 드실 것 같은 아이스 바닐라라떼를 큰 목소리로 주문하시는 할아버지, 떼로 들어와선 과일청 에이드로 통일해 사 먹는 아이들, 그리고 옆자리엔 불닭볶음면과 새우탕면을 먹는  두 여학생이 보인다. 젓가락으로 면발을 싹 돌려서 입에 넣고도 못내 아쉬워 일어나질 못하고 있다.


그래, 라면은 먹고 나면 항상 허기가 졌다. 가장 많이 먹은 건 고용센터에서 무기계약직으로 일하던 때였다. 상당한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것치곤 열악한 근무환경과 보다 더 사악한 봉급에 크게 실망했다. 시장통에 위치한 허름한 건물의 한 층을 빌려 쓰던 고용센터는 만 공공기관이지,  화장실도 한 칸뿐이고 근처에 고용센터가 없어 소도시 곳의 민원인들이곳에전부 소화해야 다.


나는 취업상담을 다. 번호표 시스템이 없어 오는 순서 대로 줄을 섰는데, 내 창구 앞에만 유독 앉을자리도 없이 늘 바글다. 만족스러운 일자리를 알선하기 위해 희망 직종, 지역,  급여, 시간, 경력 등을 상담한 후 구인업체를 찾아서 안내해 주고 약도까지 그려가며 설명하고 회사에 소개 전화까지 넣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동시에 상담 내용도 전산에 기록하고, 구직신청서를 받아 서류도 남겨야 한다. 인당 최소 30분 이상 걸릴 일을 거의 5분~10분꼴로 한 명씩 쳐내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차분히 기다리던 이들도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표정이 굳어지고 단단히 팔짱을 끼고 치솟는 화를 참기 위해 벌떡 일어나 서성거리며 나를 계속 노려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승모근도 점점 하늘로 치솟았다. 그렇게 긴장하며 일하다 여섯 시에 퇴근을 한다. 지하철 하나 뚫리지 않던 때고, 오직 하나의 도로만이 이 도시 밖으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지금은 교통이 조금 나아졌을 거라 믿어본다. 포기하고 웹툰을 보다 보면 여덟 시가 넘어 곤죽이 되어 집에 도착한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가방을 집어던지고 냄비에 물을 올리고 면과 스프를 다 때려놓고 TV를 켜서 예능프로로 채널을 고정해 둔다.


어느 정도 끓으면 후추와 고춧가루를 풀어 매콤한 향이 올라올 때 불을 끄고 냄비째 들고 온다. 불까 봐 허겁지겁 면을 건져먹고 밥을 말아 김치를 곁들여 바닥이 보이게 먹는다. 다 먹을 때쯤 갑자기 배부른 느낌과 함께 거역할 수 없는 식곤증이 찾아온다. 상을 저만치 밀어 두고 나갔다 온 옷 그대로 침대에 누워 아침까지 열 시간씩 잠을 잤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고 자도 자도 졸렸다. 열정은 금세 사그라들고 앵무새처럼 멘트를 했다. 월급이 아닌 연봉이 일년에 삼사만원쯤 오른다는 옆자리 무기계약 선배의 얘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안정적일 것이라 믿었던 자리에 갔어도 인생은 여전히 김이 모락모락하는 냄비에 고개 박은 듯 뿌옇기만 했다.


매일의 풍경은 똑같았다. 나를 죽일 듯 노려보는 민원인들 아래 눈치 보며 앉아있다가 집에 오면 라면을 끓여 먹자마자 잠들었다. 일하면서도 무기력할 수 있단 걸 처음 느꼈다. 몸이 가장 쇠약했던 때이기도 하다.  나는 그 시기를 '사라진 시간, 죽은 시간'이라 부른다. 배터리가 나가 멈춘 걸 두고 시계가 죽었다고 표현하기도 하듯 말이다.  


바쁘게 사는 것 같아도 죽은 거나 다름없이 꾸역꾸역 살던 그때처럼, 추진력을 잃은 채 바삐 뒤로 걷고 있다. 일할 땐 회사, 집을 오가는 패턴에 매몰되고, 일하지 않으면 생각에 매몰된다. 그래서 때론 인생이 실제보다 복잡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은 실체도 없고 아무 힘도 없다. 라면처럼 금세 꺼지고 피와 뼈도 되지 못하는 생각은 끊고 째깍째깍 앞으로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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