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천천히 가기

by 바다숲

다 있는 샵에 가서 무광흰색페인트와 롤러, 붓을 사 가지고 왔다. 어젯밤에 미리 곰팡이 제거제를 베란다에 다 뿌리고 마른걸레로 닦아두었다. 흔하디 흔한 블로그 글 하나 검색 해보지 않았다. 참고로 내 MBTI는 ENFP다. 애초에 순서나 전략, 꼼꼼 따윈 계획에 없고 곰팡이 있는 집에 환자를 둘 순 없다는 마음뿐이다.



바닥에 신문지를 대충 깔고 페인트 통에 롤러를 잠길 정도로 푹 넣어서 벽에 대고 밀고 당기기를 수차례, 팔에 쥐가 날 것 같다. 붓으로는 택도 없고 롤러를 안 사 왔으면 어쩔 뻔했나 아찔하다. 손 닿는데 까지만 하고 천장은 도저히 엄두가 안나 포기하고 도구를 정리하다 보니 이건 진짜 혼자 할 짓이 아닌 거다. 작업 중 화장실 거울을 봤는데 얼굴이 시뻘게져 있고 욕이 절로 나올 만큼 힘들다. TV로 봤을 땐 재밌어 보였는데... 머쉬베놈과 미란이의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노동요(VVS) 덕에 그나마 버텼다.


종일 굶다가 배달시킨 초밥을 막 한 입 뜨려는데 언니한테 전화가 와서 통화하고 이어서 새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임서방은 좀 괜찮아? 그래~ 넌 어디야? 집이라고? 왜 병원에서 밤새지 않고? 뭐?그래도 아픈데~네가 같이 있어줘야지.”

오늘만 몇 번을 전화해서 타박을 다. 코로나라 면회나 간병이 안 되는 상황을 말씀드려도 이해를 못 하신다.

왜 ‘새’ 자가 붙는지 알 것 같다. ‘새’ 자와 ‘시’ 자는 발음만 비슷한 게 아니라 그 기능과 성향이 비슷하다. 아빠라면 딸에게 절대 안 할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아. 귀찮다. 오늘처럼 피곤하고 지칠 때는 좀 놔두면 좋을 텐데. 앞으로 누군가가 정말 힘들어 보일 때는 연락을 자제하는 것이 배려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먹고 싶던 초밥을 집어 먹는데 맛이 하나도 없다. 음식이 식은 게 아니라 입맛이 떨어졌다.



페인트칠을 마치고 옷장을 정리하고, 책꽂이를 안방으로 옮기고 오래 묵은 책을 정리했다. 정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틀어놓은 TV에서 45년간 산을 오른 설악산 마지막 지게꾼이 나왔다. 하던 걸 멈추고 쇼파 앞에 앉았다. 조세호가 최근 백록담에 갔는데 내려가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 하자, 그분이,

‘모든 게 그렇다.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많이 다치고 힘들다.’고 했다.

그러자 유재석이 맞장구친다.

“인생도 그렇잖아요. 내려갈 때가 더 힘들잖아요.”


이제 자야겠다. 남편이 오기 전, 일을 다 해치워야지 생각했다. 정상은 다음 산행 때 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