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맛있는 추억

by 바다숲

반도체 회사의 구내식당 1층은 한식이었고, 2층은 양식이었다. 한식의 아침식사는 누룽지와 국, 김치를 비롯한 몇 가지 반찬이 나왔고, 양식은 크루아상과 버터, 잼, 샐러드가 나왔다. 둘 다 포기할 수 없어 1층에서 먹고 또 2층에 올라가 먹고 심지어는 아침밥 먹을 시간이 없는 직원을 위한 포장 빵까지 들고 왔다. 기숙사로 돌아와 씻지도 않고 쓰러져 한두 시간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면 허겁지겁 빵을 먹고 바로 일하러 갔다. 잠만 자도 금세 배가 꺼졌다.


크고 먹음직스러운 닭 한 마리가 들어간 걸쭉한 삼계탕이 나오면 오늘이 복날이구나 했다. 어린이날에는 미국 피자처럼 크고 두툼한 피자와 스파게티가 나왔는데, 그날은 특별히 외부에 개방되어 직원들이 자녀들과 함께 와서 맘껏 먹을 수 있었다. 근로자의 날에는 스테이크 정식에 후식까지 나와서 고급 레스토랑이 부럽지 않았고, 비번인 날을 제외하고는 그 모든 게 무료였다.


밤 열 시에 퇴근하는 스케줄이 친구와 맞을 때면, 동대문에 놀러 갔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땐 새벽시장이 굉장히 활성화되어 불야성을 이뤘다. 두타와 밀리오레 그리고 뒤편의 재래시장을 밤새 싸돌아다니다 운 좋으면 연예인을 마주치기도 했다.

옷 사는데 돈 쓰기가 왜 그리 아깝던지. 밀리터리룩이라 불리는, 군복 티셔츠 하나로 일년 사계절을 났더니 다들 교복이냐고 놀려 댔다. 그저 손에 커다란 만득이 핫도그(요즘엔 감자 핫도그) 하나 들고 구경만 다녀도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떡볶이, 순대, 핫바, 와플을 비롯한 길거리 음식을 먹는 재미에 뺀질나게 갔다.


수원역에서 첫 통근버스를 갈아타고 회사로 돌아오면 동트기 전, 5시쯤 되었다. 그때부터 구내식당 앞 벤치에 죽은길게 누워 식당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6시 정각에 식당 문이 열리면 일등으로 내달려 들어갔다.

점심 회식으로 후문에서 제육과 닭볶음탕을 자주 먹었다. 빨간 제육볶음에는 좋아하는 당면을 넉넉히 넣어주셨고, 김가루를 잔뜩 넣고 불판 위 은박지가 찢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달달 볶아낸 고소한 볶음밥은 기가 막혔다.

깻잎이 듬뿍 들어간 닭볶음탕은 향긋하고 매콤 달큰하고 쫄깃했다. 한 엔지니어가앞접시에 덜어주다가 하필 내 흰색 바지에 빨간 국물을 다 쏟고 눈치를 보는데, 그게 뭐가 그리 웃겼는지 낄낄대자 다 같이 와~하고 웃었다. 당시 유행하던 시카고 피자는 이만 원이 훌쩍 넘는 고가였는데도 순식간에 한 판을 먹어치우고 '한 판 더!'를 외쳤다.


늘 함께이던 친구와 술집에 가서 예의상 500cc 한잔 시켜 놓고 안주를 세 개씩 깔아놓고 먹었다. 반반 치킨으로 시작해서 골뱅이 소면을 시켜 먹고, 마무리는 항상 라면사리를 넣은 참치김치찌개에 밥을 말아먹고서야 배 뚜드리며 ‘아~잘 먹었다’ 하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빵집에서 제일 커다란 모카케이크를 사 와서는, 정확히 반을 갈라 친구와 반반씩 퍼 먹었다. 망에 들은 오렌지를 앉은자리에서 다 까먹고 기다란 원통에 든 미국 감자과자를 매일 한 통씩 먹고, 밥을 그렇게 먹고도 매점에서 떡볶이와 튀김을 사 먹었다.




제일 좋아하는 수박만은 유독 먹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기숙사에 칼이 없었고, 당시에는 반통을 잘라 팔고 하는 것도 없었다. 비번인 날 고향집에 가서 수박을 사 와 뚜껑만 따서 숟가락으로 한 통을 다 퍼먹고 온 날,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친구도 그날 집에 갔다 왔는지 화장실에서 계속 마주쳤다. 둘이 얼싸안으며

“너도 수박 많이 먹었구나.”

하고 우는지 웃는지 모르게 흐느꼈다.


번 돈을 대부분 먹는 데 썼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빈 냉장고만 수십 번씩 열어대던 어릴 때의 결핍 때문이었나, 아니면 어린 나이에 집 떠나 외로웠나. 먹어도 먹어도 뭔가 모르게 헛헛한 시절이었다.

작년에 가보니, 아는 가게는 분식집 하나 남아있었다. 가게 안도, 바지런하던 젊은 사장도, 메뉴도 다 바뀌었는데 상호만 그대로였다. 어색하게 앉아 주위를 둘러보다 라볶이와 김밥을 시켰다. 그때 그 맛은 아니었지만, 싹 비웠다. 똑같은 일상에 공허했던 속을 든든히 채워준 그 모든 먹거리들. 이제 더는 찾아갈 곳 없지만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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