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행이었다. 야간 근무를 마친 그는한걸음에 달려와 대전 가는 무궁화호 기차에함께 올랐다.입석이라 붐비는 좌석 옆에 서있다가답답해진우리는 객실 사이의 중간 통로로 나왔다. 화장실 오른편짐 놓는 선반위에올라앉고 그가 앞에 서서선반을 양손으로 짚고 고개를 숙여닿을 듯이 마주보고있었다.
“아따~그림 조~타~~ 어디애인 없는 사람 서러워살겠나?”
ktx를 타고 가면서봐도 깡패 같은남자가식상한 멘트를 툭 날리고 갔다.그는 말릴 새도 없이쫓아가멱살을 잡았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
따라간 내 눈앞에드라마의 한 장면이 펼쳐졌다. 그가 멱살을 틀어쥐고내려다보는데 피지컬의 차이가 큰지라 남자는 사과하고 풀 죽어 떠났다.
살짝오버였지만 여자 친구의 명예를 지키고자 욱하는 모습이 역시 내 평생의 이상형,진정한 상남자였다.기차가 떠내려가게'이 남자가바로 내 남자예요~.'자랑하고 싶었다.간신히이성을 붙들고 그의 팔을 살포시 잡으며, 큰 싸움 날까 걱정되니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손가락까지 걸며 당부했다.
대전에서 한 거라곤 시내를 걷고 커피를 마신 게 전부다.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만잡고걸어도 가슴이 벅차오르고팔만부딪쳐도몽글몽글 설렜다.밤새우고 눈 한 번 붙이지 못한그는 역에서쌍코피를 쏟았다. 그렇게 코 양쪽에서 진한피가 동시에 주르륵 흐르는 걸 처음 보았다.
근무가 맞을 때면 그는 설비 점검을 핑계 삼아라인에 놀러 와 아예 눌러앉았다. 야간엔 근무자가 별로 없어둘만 있을 수 있었다. 나는 동그란 의자에 앉아 빙글빙글돌고 있었고, 그는 설비에비스듬히기대서실없는 잡담을 끝없이 주고받았다.진공상태같이 고요한 라인 안에 설비 돌아가는 소리만 들리던그때의평화로움이가끔 생각난다.
다른 엔지니어와대화라도하면 괜히 와서큰소리로내 이름을 부르고 인사를하고 지나갔다.
“혜현 씨!! 안녕하세요!?”
귀여워서 일부러 말을 섞은 적도 있다. 그럼조용히내 뒤로다가와방진복 팔꿈치를 잡아당겼다.
우연히 식당에서 마주치면 웃음을 참으며 깍듯이 인사하고 서로 먼저 뜨라며장난을 치다가 식판을 든 채 배식구에 계속 서 있었다. 그렇게 티를 냈는데도, 아무도 사귄다는 의심조차 안 했다.
그땐 어디든 공중전화가 널려 있었다. 마침공중전화 앞을 지나는길에 남자 친구에게 전화하게백 원만달라고 했다가 그냥달라고 하지 왜 거짓말로 삥을 뜯냐며 한 소릴 들었다.
한 번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너무 답답해서, 아주 입 싼동기 방에서 과자를 까먹으며, 그와 사귄다고털어놓았다.
“뻥치시네~ 야. 사기 칠 걸 쳐라. 그 남자가 미쳤냐. 약 먹었냐? 너 같은 앨 좋아하게!”
온갖 험한 소리를 다 들었지만, 계속 웃음이 나왔다.
미리 말하는 예의조차 갖추지 못한 채 퇴사를 했다. 집에 내려와서도재래식 변소 앞에서 때로는 담 밑에 쭈그려 앉아몇 번통화를 하곤했지만, 그마저끊어졌다.
대학에 가고 또다시겨울로 접어드는 쌀쌀한날에 대전 시내를 혼자 걷고 있었다. 여기저기 손을 잡거나 팔짱을 낀 연인들이 그날따라 눈에 띄었다. 순간 머리를 맞은 듯했다.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허둥댔던 게, 그를 잊어서였구나.말도 없이 그를 두고 와서였구나. 매일 인상 쓰며 일어나 도서관으로 학교로 허겁지겁 살면서 다 잊었다. 번호를 찾는마음이 처음 그날처럼떨렸다. 몇 번의 연결음이 울리고 잊을 수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잘 지냈냐고, 미안하고많이 고마웠다고 말했다. 그제야 가슴이 저려왔다.
ktx보다 무궁화호 타는 걸 좋아한다. 좋은 이와 오래 같이 있던 기억 때문이다. 기차가 서면 기다렸다맨 마지막에 천천히 내려 모두 빠져나간 텅 빈 철길 옆을 바라본다. 그곳엔 당황하며손등으로연신 코피를 훔치는 그와, 애틋하고 애잔하게 바라보는 내가 마주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