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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Sep 08. 2022

선 앞에서

매력적인 연예인을 보면, 감탄하다가도 돌연 부아가 날 때가 있다. 잘생기게 태어난 이유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구나 하다가 금세 풀이 죽는다.       


야간 대학에서 만난 진희는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동안 늘어지게 자다가 퇴근하는 나와 만나 밥을 먹고 수업에 들어갔다. 내가 밤낮없이 공부할 때, 그녀는 술자리에 있거나 연애를 했다. 또한 지역 미인대회에서 입상한 이력을 바탕으로 대학 홍보모델을 했으며, 방학 중에 공짜로 미국도 다녀왔다. 교수가 극찬할 정도로 글쓰기 재능도 특출했다. 나는 모든 순간, 모든 면에서 열등감을 느꼈다.    


교직이수를 위해 사범대로 편입한 후엔 보습학원의 강사로 일했고, 보일러를 떼지 못해 겨울에도 찬물로 샤워를 하고 입김이 나오는 방에서 잤다. 두 시간씩 자며 공부해서 장학금을 탔지만, 정작 임용고시는 번번이 탈락했다.     


그녀는 야간 대학을 졸업하고 학비가 비싼 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단 한 번의 아르바이트 없이 풀옵션의 신축빌라에서 애완견을 키우며 풍요롭게 지냈다. 교수추천으로 기간제교사로 갔다가 교장 눈에 들어 바로 정교사가 된  그녀를, 나는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간절해야 성공한다고 말한다. 스물다섯부터 서른살까지 붙잡고 있던 시험은 다른 길을 알지 못할 정도로 간절했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다가 딱 1년, 공부만 매진해보자 한 적이 있었다. 단 1분도 방해받지 않고 모든 시간을 공부에 쏟겠다고 단단히 결심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좋아하는 드라마와 예능을 보고 종종 늦잠을 자고 점심을 먹고 식곤증에 낮잠도 잤다.


마다 '킬빌'의 우마서먼처럼 미친듯이 칼을 휘둘러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정확히 말하면 얼굴없는 이들의 목을 잘랐다. 매일 이백 명쯤을 처단하면서 정작 처단하고 싶었던 건 바로 내가 아니었을까. 누구에게도 손 내밀 수  없던 간절함 속에 편안한 꿈자리는 허락되지 않았다. 나처럼 간절할수록 긴장과 불안에 잠식되어 기량을 다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  면접에서도 절박하고 여유 없는 태도가 오히려 호감을 떨어뜨려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간절하지 않은 게 아니라 너무 간절해서 망치는 것이다.


세상 이치에 무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오직 나의 노력 부족만을 탓하며 실패를 겸허히 받아들인 것이다. 그녀와 같은 대학을 다녔다고 해서 같은 선상에서 출발했다고 착각을 했다. 물론 구김살 없이 밝은 성격과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성공을 견인했을 거라는 데에 이견은 없다. 그러나 결국 그 태도도 부유하고 든든한 부모와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난 영향으로 형성되었을 것이다.


남모를 그녀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기회와 선택의 폭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처럼 되는 방법은 오직 임용고시뿐이었다. 공부와 일을 병행하며 몇 번을 미끄러진 후, 마치 절벽에서 떨어진 사람처럼 다시는 도전하지 못했다.


나와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출발선이 달랐다. 평등하지 않았다. 탓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는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하고 싶다.  

   

아무리 유리한 출발선에서 시작했을지라도 특혜는 조금씩 옅어져 갈 것이다. 타고난 외모는 세월의 풍화작용에 의해 평등해질 것이고, 열정과 꾸준함이 뒷받침되지 않는 재능은 퇴화할 것이다. 언젠가 내가 선택한 가정 안에서 재력과 화목을 자력으로 가꾸어야 할 시점이 찾아오기도 한다. 중년 즈음엔 어떤 방식으로든 인생이 재배치되는 것 같다. 어쩌면 살면서 힘겹게 찍은 점들이 어느 순간 하나로 연결되어, 새로운 출발선이 만들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구는 돌고 돈다. 인생도 끝날 때까지는 끝없이 펼쳐진다. 무력감에 휩싸여 뒤쳐진 최초의 출발선만을 노려보고 있을 것인지, 돌고 돌아 제자리 같아도 계속 걸어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설 것인지 선택할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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