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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Oct 06. 2022

일장춘몽

메일만 정리해도 탄소가 줄어들어 환경을 살린다는 글을 읽었다. 얼른 실천하고자 도서관에서 열어보니  수백 통의 안 읽은 메일이 쌓여 있다. 한 번에 지우는 방법이 있을 테지만, 컴맹이라 한 페이지씩 넘기면서 지워나갔다. 반복해서 전체 선택, 삭제를 누르는데 언뜻 '축하'라는 글자가 스친 것 같았다. 다시 휴지통에 들어가서 확인하니, 맞다. 제목이 '축하합니다_수필' 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댔다. 간신히 가라앉히고 연 메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축하합니다." 00 신인상 응모에서 수필부문 심사를 통과하여 당선되었습니다.


노트북을 쾅 닫고 화장실로 내달려가 문을 잠그고 방방 뛰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게 웬일이야. 이게 뭔 일 이래. 꿈이 이뤄지는 거야? 평생 등단은 꿈도 못 꿀 줄 알았는데...'


두 군데 문예지에 글을 보낸 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처럼 메일을 연 날부터 불면의 밤이 찾아왔다. 걱정으로 잠 설치던 숱한 밤과는 그 결이 완전히 달랐다.


커피를 대접으로 들이켠 사람처럼, 마치 심장병에 걸린 사람처럼, 애타는 사랑고백을 받은 사람처럼 두근거려 잠이 오지 않았다. 혼이 빠진 사람처럼 왔다갔다하며 며칠을 하얗게 새고 피곤해서 혀에 백태가 잔뜩 껴도 종일 싱글벙글거렸다. 어쩜 근 몇 년 동안 가장 설렜다. 기쁘고 벅차서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마음이 꽉 차고 허하지 않아서 며칠간 홈쇼핑도 쳐다보지 않았다.


심지어 그날부터 글도 전보다 잘 써지는 것 아닌가. 가슴속에 차 있던 글들이  저마다 나오려고 앞다투어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거나하게 취한 내내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믿기지도 않고 해서 아무한테발설하지 않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있지. 수필 당선됐다."

"오~ 대단하다. 너는 뭘 그렇게 계속하고 있냐. 책은 언제 나오는겨?"

"언제 나오는지는 잘 모르겠어."

그러고 보니, 이런 큰 경사에 전화 한 통 없이 메일만 주고받는 건 좀 이상했다.


이번 생애 처음이라 등단 증서를 주는 건지, 상패인지, 상장 종이인 건지, 등단 여부는 어떻게 확인하는지 등 궁금한 것 투성이었다. 질문을 메모한 후 목소리를 가다듬고 메일의 번호로 전화를 걸으니, 지긋한 음성의 담당자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수필부문 당선되었습니다. 혹시 통화 가능하세요?"

"네. 말씀하세요."

"잡지에 실렸을 때 등단이 인정된다고 하던데, 글이 언제쯤 실릴까요?"

"연락이 갈 거예요."

"편집돼서 못 실릴 수도 있나요?"

"뭐, 되겄죠~."

심드렁한 말투에 살짝 상처받았지만 계속 웃음기를 넣어 말했다.

"그럼 잡지는 집으로 보내 주시나요?"

"음... 문학계에는 관례라는 게 있는데~ 같이 공부한 사람도 있을 테고, 선생님도 있을 테고 하니까 본인이 사서 주변에 인사하고 그러는 거예요. "

"아~!"






순식간에 누군가 발목을 잡아채서 끝없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내가 또...세상 물정을 몰랐구나... 

글쓰기에 전혀 관심 없던 남편도 '등단'이란 말에 같이 기뻐해 주고 칭찬과 응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 늘 돌던 공원의 트랙을 터덜터덜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맑던 가을 하늘이 왠지 어두워보였다. 기분이 왜 이리 엉망인 걸까.



다음날, 모르는 번호로 카톡이 왔다

"등단 관련해서, 잠시 통화 가능하신지요?"

'이건 또 뭐지?'

바로 전화를 걸었다. 또 다른 문예지의 그분은 '등단에 관심이 있냐'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순전히 착각이겠지만, 마치 밀매상이 마약에 관심 있냐고 묻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일단 '관심 있다.' 고 했더니 등단을 하면 등단 증서도 주고, 상패도 주고, 호텔에서 시상식도 하고 정식 수필가가 되어서 나중에 책 낼  때 수필가라는 명함을 박을 수도 있단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에게 책을 사서 나눠줘야 하잖아요. 저희가 적정한 권수를 책정했는데 그게 삼십 권이에요. 한 권에 만 이천 원인데, 작가님껜 만원에 드려요. 그리고 등단 비용이 들어가요. 문단의 아주 권위 있는 분들이 심사를 하셨으니 예우하는 표시루다가 20만 원..."


정중한 답신을 보내고, 남편에게 그간의 일을 소상히 말했다.

"그거 신종 사기 아냐?"

아, 이놈의 예리한 현실감각. 그제야 왜 기분이 나빴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자존심이 상했던 거다.


쓰디쓴 뒷맛이 굉장히 오래갔다. 김영하 작가조차 주변의 칭송에 '사기꾼 증후군'을 느꼈다는데, 왜 나는 말도 안 되는 당선 메일을 받고 마냥 좋아했을까. 요행을 바랐다, 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과욕을 부렸다.


만약 '등단 비용'을 입금했다면 어땠을지, 아주 조금 궁금하긴 하다. '등단증'을 손에 넣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차 버린 건가 싶지만, 덥석 쥐었다면 후회했을 것 같다.


그래도 날지 못하는 거위가 한바탕 하늘을 나는 달콤한 꿈을 꾸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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