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감기 싫어서 가만히 있다가 하루가 훅 지나간 적. 시간은 계속 흐르고, 머리 감는 일이 지구를 떠받치듯 무겁게 느껴질 때 말이에요, 산더미 같은 설거지통을 보면서 느끼는 두려움 비슷하게 말이에요.
아침에 일어나는데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손을 안으로 넣었다가 죽 훑기를 반복하니, 백 가닥 정도가 우두두 떨어지네요. 음... 아무래도 머리를 감으라는 신호겠죠.
전에는 최대 5일까지 감지 않아도 머리카락이 두피에서 분리되는 현상이 흔하지 않았는데요. 지금은 사흘만 안 감아도 탈모를 걱정하게 되네요. 어제도 더는 버틸 수 없었지만, 내일은 꼭 일어나자마자 머리를 감아야겠다 다짐하고 그냥 잤거든요.
그런데, 문득 집에 먹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 오늘은 오랜만에 최애 음식인 돼지고기 묵은지찜을 해야겠네요. 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부엌이 난장이 됐네요. 이따 저녁밥을 먹은 후 같이 치워야겠습니다.
그럼 이제 머리를 감고 나가면 됩니다.
그런데... 밥 하느라 완전히 지쳤어요, 소파에 뒷목을 대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고 한 시간을 잤네요. 불편한 자세로 자 그런지 좀 언짢네요. 목도 아프고, 거실에 이불을 깔고 눕습니다.
햇빛을 받으면서 도토리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아 그런데, 생각해보니 올해 내내 도토리 시간의 연속이었네요.
그럼 좀 어때요? 너무 편합니다. 마침, 남편도 야근이라 늦게 오네요. 정말 너무 좋습니다.
이젠 머리를 좀 감아 봐야지. 거실에 깐 새 이불에 내 머리카락이 닿으면 이불이 오염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억지로 일으키려 했지만 또 졸리네요.
왜 자꾸 졸릴까요? 소화가 안 될 정도로 많이 먹었나 봅니다. 과식을 하면 소화시키고자 모든 에너지가 다 위장으로 몰리기 때문에 뇌, 팔, 다리로 갈 에너지가 없어서 축축 처진다고 합니다.
아하, 자연현상이군요. 다시 눕습니다.
한 숨 자다 일어나니 뜨거운 햇살이 사라졌네요. 네시가 넘어갑니다. 이제 슬슬 움직여 볼까... 싶기도 하지만 자고 나니 또 배가 고픕니다. 참으로이상한 배지만 어쩔 도리가 없죠. 먹어야죠. 먹으면 또 졸리죠. 그렇게 오늘도 도토리 시간은 반복됩니다
좀... 너무하다 그런 생각이 들 찰나입니다. 위험합니다. 이런, 즐겨야죠. 도토리 시간을 남용하는 건가 우려도 됩니다만, 좋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절박하게 쉬기로 했잖습니까. 백수의 초심을 그새 잊었냐며 스스로 꾸짖어봅니다.
인생을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자 너무 애를 썼습니다. 오늘은 머리를 감지 않는 것으로 나를 기쁘게해주고자 합니다. 이슬아 작가는 항상 지겨운 나를 지겨워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 위해 사랑을 하는 거라고 말해요.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사랑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남은 쉽게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나에게는 쉽게 실망하고 비난하고 다른 이와 비교하기 때문이겠죠. 세상에는 아름답고 당차고 단단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바쁘게 돌아가는 이야멸차고 매정한 세상에서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건, 내가 멋지고 대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나를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 아니었을까요. 나를 사랑한다니, 생각만해도 미소가 지어지네요. 두서없는 얘기를 해 보았습니다. 사실 그냥 귀찮아요.
하루 종일 머리를 감기 위해 사투를 벌인 게 아니라 내 머리를 쉬게 해 준 하루였다고생각합니다. 물론 조금 간지럽긴 하지만요. 그래도 퍽 좋은 하루였습니다.
도토리 시간 : 이진희작가의 그림책 <도토리 시간> 중에서 인용. '아주 작아져서 도토리 집 안에 들어온 듯, 고요한 중에 편안하게 쉬는 나만의 시간'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