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

백수를 지켜라

by 바다숲

운동화와 물병을 들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주민센터 헬스장에 갔다. 기구에 앉자마자 할아버지가 이런 자세로 하면 안 된다고 참견을 하셨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웃으며 정중하게 사양하면, 가실 줄 알았다.

"나 여기 관장인데, 젊을 때 운동선수를 20년 넘게 했거든. 내 말 듣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이럴 시간이 없다고 바쁘다고 필사의 저항을 해봤지만, 기어이 '여기가 자극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옆구리를 치는 바람에 불쾌해졌다. 원치 않고 눈치 없는 코치는 계속되었다.


오지랖 관장을 마주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6시 반에 일어나 눈도 못 뜨고 헬스장에 갔다. 그걸 본 남편이 한마디했다.

"와이프 어디 출근하는 줄 알았네~."

피곤해서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길 정도였다. 뭐 백수니 상관없지만, 피해 다니는 게 짜증스러워 관뒀다.


나를 구속하는 시원한 헬스장 대신, 쇠도 녹일 삼복더위에 걷기 운동을 했다. 물병 든 가방을 메고 땀을 주룩주룩 흘리며 딱 하루 걸었는데 라운드로 선명하게 목에 경계가 생겼다. 며칠 더 걸으니 더위 먹은 양 온몸에 힘이 쭉 빠지고 무릎이 욱신한 게 어째 전보다 몸이 안 좋아졌다.


침대와 한 몸이 되어 구르다 불현듯, 벼르던 컴활 자격증이 떠올랐다. 아싸. 할 일이 생겼다! 아드레날린이 치솟으며 벌떡 일어났다. 코참패스 (컴활 접수 어플)에 사진 등록이 되지 않아 상공회의소에서 본인 확인을 한 후에, 서점에 들러 컴활 필기책을 사 왔다. 공부기간을 검색해보니 2주 안팎이라 맞춰서 접수를 했다. 다음날 9시, 도서관 문이 열리자마자 제일 구석자리를 선점했다. 영상 강의를 십여분 들었을 뿐인데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배가 무척 고팠다. 한식뷔페에 가서 닭볶음탕을 집중 공략한 후 돌아와 졸다가 공부하다 하는데 너무 피곤했다.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2주는 젊은이들 기준 같아 접수를 취소했다. 그제야 얹힌 속이 좀 편안해졌다.


하루만 정말 아무것도 안 야지. 맘먹고 소파에 앉아 TV를 보면서도 머릿속에선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 그동안 한 게 아까운데...'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운동복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긴 그대로 망부석처럼 몇 시간을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하는 것 없이 완전히 지쳤다.




백수생활을 방해하는 공격은 계속될 것이다. 가족의 잔소리, 눈치 없이 찌는 살, 헬스장의 빌런, 낮의 더운 집, 텅 빈 통장 잔고, 무기력과 우울감, 바쁠 때가 좋았다는 착각. 그리고, 죄책감을 건드리며 불안을 조장하는 내 안의 목소리.

'어이! 종일 집에 있는데 뭐라도 해야지. 책도 보고 체력도 기르고 살도 빼고 자격증이라도 따서 미래를 대비해야지~.'


묻고 싶다. 했을 때 돈 버는 거 말고 뭐 그리 대단한 인생을 살았나? 일할 땐 직장인 마인드를 그토록 강조하더니, 백수면 백수답게 낮밤도 좀 바뀌고, 아침 댓바람부터 라면 끓이고 야밤에 치킨 좀 시키고 유연한 백수 마인드를 가져야지. 백수가 규칙적으로 사는 게 더 웃기는 일 아닌가.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듯, 생각을 전환해보자. 습관처럼 올라오는 속삭임을 내치고, '생산성'이라는 단어를 지워보. 놀 줄 모르고 놀 사람 없어도 섣불리 포기 말고 끝까지 버텨야 한다. 오늘이 백수로서 마지막 날인 듯 절박하게 쉬어야 한다. 뭐든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는 권리는 곧 사라질 것이다. 지금 걷는 이 길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길이고 끝까지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자, 의 날이다. 알람은 전부 끄고 늘어지게 자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TV를 보고 깔깔대라. 맑은 공기를 깊게 들이마셔라. 물 한 병 들고 길을 나서라. 천천히 걷고 지는 노을과 바람에 스치는 별을 하염없이 올려다봐라. 멀리 가고 싶다면 기차에 올라 창 밖을 응시해라. 세상은 멈췄고, 나는 자유롭다.

내가 쉬면 세상도 쉽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혜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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