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피앤아이 홍창수 Ph.D
[그림1] 최초의 프로그래머라는 수식어가 붙는 '에이다 러브레이스'
최초의 프로그래머라는 수식어가 붙는 '에이다 러브레이스'
호기심 많고 수학과 공학을 좋아하는 영국 여성이었던 에이다는 1815년 유명한 낭만파 시인 바이런의 딸로 태어난다. 과학만능주의가 팽배하던 19세기를 살다간 귀족여성으로 이학적인 관심과 타고난 지능을 바탕으로 초기 컴퓨터과학에 인상적인 발자취를 남겼다. 본명은 어거스터 에이다 바이런(Augusta Ada Byron)이지만 러브레이스 백작과 결혼하면서 지금은 보통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로 알려져 있다. 에이다의 어머니는 아버지인 바이런 집안의 방탕함(아버지인 '바이런'은 잘생긴 외모에 상원의원과 유명한 시인으로 여성관계에 있어서는 돈주앙급 인물이다. 유부녀, 이복누나 등 200명과의 여성편력이 있었다고 한다. 바이런의 일대기를 그리면 아마도 바람둥이 막장 드라마 한편이 나올 것 같다.)과 무절제함이 딸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해 문학공부보다는 이과 분야를 배우게 했다.
에이다는 찰스 배비지의 연구에 대한 좋은 이해자이자 협력자였고, 배비지가 고안한 해석기관을 위한 공동작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해석기관에 처리할 목적으로 작성된 알고리즘([사진1] 베르누이 수 계산을 위한 다이어그램)이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인정되어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또한, 프로그래밍 언어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개념인 루프. GOTO문, IF문과 같은 제어문의 개념을 소개하였다. 초기 프로그래밍 언어인 에이다프로그래밍 언어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언어이다.(IHOK에서 개발한 카르다노(Cardano) 플랫폼에서 사용하는 암호화폐 에이다도 에이다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 진 것이다.)
[사진1] 베르누이 수 계산을 위한 다이어그램,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 ,1842).
말년에는 어머니의 바램과는 달리 여러 남자와 스캔들에 빠졌고 본인의 수학적 재능을 이용해 도박에 뛰어들었으나 재산을 탕진했다. 36살에는 자궁암으로 사혈요법(사혈은 피를 몸 밖으로 빼내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말한다.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치료 효과가 없다고 알려졌다. 특별한 의학지식과 치료방법이 없던 시절 사혈이 가장 대중적인 치료방법이었다.)에 의한 부작용으로 사망하였다. 아버지인 바이런이 말라리아 열병과 잘못된 처방(사혈요법)으로 사망한 나이인 36살로 같다.
[사진2]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
여기까지가 대부분이 아는 에이다의 일반적인 이야기이다.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때([사진2] When Einstein Walked with Gödel 의 한국번역본 2020년 5월 출판)'라는 책을 보면 에이다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과는 배치되는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유시민 작가가 좋은 책이라고 추천한 책이기도 한 이 책에서 한 챕터에 걸쳐 에이다 관해 작가가 수집할 사실을 펼쳐놓았다. 실제로 에이다는 여러 서신에서 유추해 볼때 기초적인 수학도 잘 이해 하지 못했고, 최초로 작성된 프로그램이라고 추앙받는 주석문도 대부분 찰스 베비지가 대신 작성해 줬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베비지가 영향력이 있는 에이다가 한 것처럼 꾸밀 필요성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으면 사실상 에이다에 대한 환상이 대부분 깨진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에 대한 여러 논란에도 불구 아직도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라는 수식어가 붙는 위상이 완전히 깨진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중립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배비지가 많이 도와준 것은 사실이고 공동작업을 했다고 봐야할 것 같다.
[사진3] 스탠퍼드 교수이자, 구글 수석과학자인 페이페이 리는 2009년 이미지 인식 인공지능을 개선하기 위해 이미지넷(ImageNet)을 개발했다.
스탠퍼드 인공지능연구소장인 '페이페이 리'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 만큼 현대에도 컴퓨터 발전에 영향을 미친 여성엔지니어가 있는데 머신러닝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낸 사람은 다름 아닌 '페이페이 리(Fei-Fei Li)'이다. 리는 1976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나 쓰촨성 청두에서 자랐다. 1992년 16살 때 부모님과 함께 중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영어를 할 줄 몰랐던 아버지는 카메라 수리공으로, 어머니는 은행 캐셔로 일하면서 힘들게 페이페이 리를 키웠다. 그녀는 프린스턴 대학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해서 컴퓨터과학 및 공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매킨지, 퀄컴, 골드만삭스 등의 제의를 뿌리치고 한때 2년간 티벳에서 전통의학(중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티벳에서 돌아 온 그녀는 캘리포니아공대에 진학, 인공지능과 컴퓨터 신경과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공지능과 관련한 메이저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만 100편이 넘었고, 스탠포드 대학교는 이러한 업적을 인정 33세의 나이에 종신교수로 임명하여, 스탠포드 대학에서 컴퓨터 비전(computer vision) 연구실을 이끌게 되었다. 페이페이 리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니라 딥러닝을 다시 등장하게 만들었던 이미지 인식경연 대회(Imagenet Large Scale Visual Recognition Challenge, ILSVRC) 덕분이다.
2012년 이미지넷 대회에서 제프리 힌튼 교수의 슈퍼비전팀이 딥러닝 기술로 압도적 우승을 하여 세상을 깜작 놀라게 했다. 그 이후 해가 거듭함에 따라 더욱 발전하여 드디어 2017년에는 에러율을 3%대로 낮추게 되어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게 되었다. 페이페이 리가 만든 이미지 데이터 플랫폼인 '이미지넷'의 풍부한 데이터베이스는 딥러닝 알고리즘인 영상 이미지 딥러닝의 발전 즉, 합성곱신경망(CNN)에 매우 큰 기여를 했다.
2016년11월부터 2018년까지 구글에서 AI와 머신러닝팀의 수석과학자로 ‘구글 AI중국센터’를 이끌었고 이후 미국 스탠포드 대학으로 돌아가 인공지능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다. 현재 페이페이 리는 트위터(twitter)에 합류하여 인공지능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