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요구르트 껍질과 천국

어린아이 같은 마음

by 지경선


– 지집사가 아이들의 사랑에 응답하며


저는 새문안교회 중등부 수련회에서 다섯 끼의 식사를 준비하며,

설거지를 하고, 행주를 빨고, 요구르트를 나누는 심부름 역할을 맡은 지집사입니다.


밥을 짓거나 반찬을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배식할 때마다 조용히 다가가 ‘수련회 너무 잘 왔어. 너무 고마워. 사랑해요.’ 라며,


짧은 인사를 건넸습니다.

진심이었으니까요.


그 짧은 인사 속에서, 저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유쾌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식사가 끝난 뒤,

저는 주방 옆 재활용 구역에서 한번 물에 다 헹군 요구르트병의 비닐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에코 절취선이 있다는 것도,

그 절취선을 살짝 들어 올리면 훨씬 쉽게 벗겨진다는 것도요.


수련회 첫날, 식사가 모두 끝난 뒤

남은 요구르트 통을 모아

박미옥 권사님, 김정아 집사님과 함께

껍질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벗겼습니다.

작은 통 하나에도 손끝이 아릴 정도로 정성이 필요했지만,

세 사람 모두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다음 식사부터는

아이들이 다 마시자마자 그 자리에서 몇 명은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고,

세 번째 식사부터는 박미옥 권사님께서

절취선의 가장자리를 0.5cm 정도 미리 들어 놓으면

저희와 아이들이 훨씬 쉽게 벗길 수 있다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조언을 따라,

아이들에게 건네기 전 미리 비닐을 살짝 들어 놓았습니다.

그 작은 손길이 ‘준비된 사랑’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매 식사마다 반복할 수 있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기신 어른도 계셨습니다.

멀리서 다리를 꼬고 앉아

“왜 그런 걸 하느냐”,

“굳이 그걸 왜 까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말에는, 아마도

‘아이들에게 더 중요한 게 있을 텐데’라는

어른의 염려가 담겨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달랐습니다.

아이들은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누군가의 손길을 따라

할 수 있으면 하고, 바쁘거나 어려우면 미안해하며,

실수해서 쓰레기통에 휴지랑 딸려 버려지게 되면 수줍어하며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는지 모릅니다.

그건 단순히 요구르트 껍질을 벗기는 동작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의 섬김에 누군가가 조용히 응답하고,

그 응답이 또 다른 응답으로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퍼져 나가는 사랑의 흐름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요구르트 껍질 하나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깃들 수 있다는 것을요.


절취선을 설계한 이의 배려는

그 자체로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려는 사랑의 기술이었고,

그 마음을 존중하는 우리의 실천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생각이었습니다.


사랑은 크고 특별한 방식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작고 느린 손짓 속에도

얼마든지 깃들 수 있다는 사실을

그날 저는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그날 저는,

그 말씀이 ‘순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마음’을 뜻한다는 것을

아이들을 통해 배웠습니다.


아이들은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옳다고 여긴 것을 따라 했고,

누군가의 사랑에 자신도 몸짓으로 응답했습니다.


그건 작지만 분명한 복음이었습니다.

저는 그 복음을

요구르트 포장 비닐 껍질을 벗기며,

아이들의 손끝에서,

권사님들과의 협력 안에서

하나하나 배워갈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은

그날 저에게 껍질을 건네주던 아이들의 미소 하나하나에

한 선생님이자 지집사가

고마움에 응답하는 기록입니다.


아이들이 궁금해하던

하나님과 사랑에 대한 질문에

제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대답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작고 느린 손짓 안에 이미 담겨 있었습니다.


껍질을 벗기며 떠올린 생태에 대한 존중,

절취선 하나에 담긴 배려의 기술,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조용히 동참해 준 아이들의 손길.


그것은 작았지만 분명히 사랑이었고,

저는 그 사랑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새문안교회 중등부 친구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새문안교회 김옥주 권사님, 열심을 다한 봉사후 잠시 쉬는 시간, 수련회 주방 창가에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