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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을 통해 본 인간 주체성과 지성 교육의 가능성

기술문명 시대의 인간성과 교육을 위한 성찰

by 지경선


서론

오늘날 우리는 초연결 기술문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공지능, 알고리즘, 생명공학, 대규모 정보체계가 인간의 판단과 삶의 방향을 급격히 바꾸고 있는 이 시대에, 인간의 ‘주체성’은 어디서 어떻게 확보될 수 있을까? 또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지성’으로 가르쳐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은 어쩌면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마주했던 서학(西學)과의 충돌과 대응 속에서도 유사하게 포착된다. 『서학이라는 창』(7장)은 단순한 문화 수입으로서의 서학이 아닌, 당시 조선 지식사회를 관통한 인식론적 전환의 현장으로서 서학을 조명한다. 그들은 서학을 통해 자신들의 사유체계가 도전받고 있음을 자각했고, 그로부터 새로운 사유방식과 해석틀을 만들어냈다.


이 글은 김선희 교수님의 책 '서학'의 7장『서학이라는 창』의 사유를 매개로, 기술문명 시대의 인간 주체성과 지성 교육의 가능성을 성찰해보고자 한다.


1. 서학과 인간 주체성의 위기


조선 후기 서학은 단지 외래 종교의 유입이 아니라, 기존 유교 중심 질서 전체에 대한 ‘근본적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유학자들이 서학을 경계한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세계관과 인간관이 기존의 인식 체계와 충돌했기 때문이다. 『서학이라는 창』은 이를 “기존 지식 질서의 위협”으로 요약하며, “자연의 원리, 인간 본성, 존재 구조”에 대한 설명 방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일어난 “인식론적 충돌”로 규정한다.


오늘날의 기술문명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판단, 감정, 선택은 점점 더 알고리즘에 의해 예측되거나 대체되고 있다. 신경망 모델은 감정을 모사하고, 빅데이터는 취향을 예측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인간은 과연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조선의 유학자들은 낯선 세계와의 충돌 속에서 스스로의 학문 전통을 돌아보며 ‘주체적 해석’이라는 전략을 택했다. 서학을 받아들이되 기존 질서의 틀 안에서 재배열하고 재해석했던 그들의 방식은 오늘날 기술문명을 대하는 우리의 사유에 통찰을 준다. 즉, 기술문명을 거부하거나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어떤 인간상을 지향하며 그것을 사유의 중심에 둘 것인가를 묻는 방식이다.



2. 서학이 던진 질문: 지식이란 무엇인가?


서학은 단지 새로운 정보의 집합이 아니라, **지식의 구조 자체를 흔드는 ‘다른 방식의 사유’**였다. 『서학이라는 창』은 이를 “단지 외래 문물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전통 질서 내에서 자기를 돌아보는 철학적 운동”이라 진단한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그것을 지식으로 정제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의 삶과 사회 속에 통합해내는 능력은 점점 약화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지식이란 무엇인가?”, “지성은 어떤 역량인가?”라는 고전적 질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조선 지식인들은 서학을 통해, '무엇이 참된 지식인가'를 사유했다. 천문학, 해부학, 언어학 등 새로운 학문체계와 마주하며 단지 사실의 참과 거짓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인간과 사회를 어떤 방식으로 변화시키는지를 중심으로 성찰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인공지능의 정보를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 유효한 철학적 토대가 된다.



3. 지성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서학에서 배우는 교육적 통찰


기술문명은 아이들에게 '정보 처리 능력'을 중심으로 교육을 구조화시키려는 경향을 강화시킨다. 하지만 이는 인간을 단지 ‘정보처리 기계’로 환원할 위험을 내포한다. 이에 반해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서학’이라는 외래 체계 속에서도 자율적 해석의 여지를 찾고, 자기가 처한 역사적·문화적 맥락에서 지성을 재정의하려 했다.


특히 『서학이라는 창』은 “서학은 언제나 열린 텍스트로 남아 있으며, ‘대토론’ 가능한 주제로서 활발한 재해석의 대상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정답’을 가르치기보다, ‘지속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사유하는 능력을 키우는 교육을 지향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기술문명 속에서 아이들이 지켜야 할 ‘지성’은 단순히 정보를 축적하는 능력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와 마주하며 자기 생각을 구성하고 표현하며, 해석해내는 능력이다.


이러한 교육은 과거 조선 지식인들이 보여주었던 방식 — ‘해석하고, 사유하고, 재구성하는 주체적 태도’ — 와 맞닿아 있다.



결론


서학은 단지 종교나 과학의 유입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방식 전체를 흔들었던 ‘창’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 낯선 창을 통해 자신과 세계, 그리고 지식 그 자체에 대해 성찰하며 새로운 철학적 지평을 열었다.

기술문명 시대의 오늘, 우리는 다시 이 질문 앞에 서 있다. “무엇이 인간인가?”, “어떤 지성을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야 하는가?” 그 해답은 서학처럼 우리를 낯설게 하는 세계와 마주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되묻는 사유의 힘 속에 있다. 서학이 그랬듯, 오늘의 교육 역시 낯선 세계 속에서 새로운 주체성과 지성을 길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성환 외, 『서학이라는 창』, 서해문집, 2023.

함규진, 「조선 후기의 서학 수용과 지식인의 주체성」, 『동양사상연구』 18권 2호, 2015.

김영민, 『지식의 구조』, 문학동네, 2006.

Charles Taylor, The Ethics of Authenticity, Harvard University Press, 1991.

Nussbaum, Martha, Not for Profit: Why Democracy Needs the Humanities,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0.

Byung-Chul Han, The Disappearance of Rituals: A Topology of the Present, Polity Press,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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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 Bierstadt, River Valley Landscape in Sequoia National Park, California 이 장대한 풍경은 햇살이 빛나는 계곡과 강을 통해, 기술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는 인간 주체성과 지성의 길을 시각적으로 은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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