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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와 인공지능 시대의 문명충돌

신앙, 권력, 기술의 경계에서: 조선 천주교와 인공지능 시대의 문명충돌

by 지경선



1. 문명의 접점에서 발생한 ‘사상의 파문’


조선 후기 천주교의 수용은 단순한 종교 도입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에 대한 사유’, ‘사회 질서에 대한 의문’, ‘권위의 정당성’에 대한 전면적 전환을 촉발시킨 사건이었다. 『서학』이라 불린 천주교는 위로는 왕과 조정을, 아래로는 백성과 공동체를 분열시켰다.


조상 제사를 거부한 천주교는 조선 사회의 근본적 윤리적 기반을 흔든 혁명적 지식이었다. 이에 대한 반응은 강한 탄압이었고, 대표적으로 1801년 신유박해는 이질적 사상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는 국가의 대응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이 갈등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억압은 있었으나, 그것이 반드시 소멸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박해 속에서도 천주교는 ‘제도’ 없이도 전파되었고, '신앙'이라는 내면화된 태도 속에서 확산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가 『제네시스(Genesis)』에서 말하는 문명적 전환기의 긴장이 겹쳐진다.


키신저는 현대 인류가 맞이하고 있는 인공지능(AI)의 도래를 하나의 “철학적 단층선(Philosophical rupture)”이라 보았다. 과거에 없던 새로운 ‘행위 주체’가 등장했을 때, 인간은 자신의 존재 방식과 사고 틀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조선 후기 천주교가 유교 문명에 던진 충격이 그러했듯, 오늘날 AI 역시 기존의 지식 생산 체계, 인간의 고유성, 윤리 체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다.


2. 키신저가 말하는 ‘AI 문명’과 조선의 대응 방식


『제네시스』에서 키신저는 인공지능이 기존 인간 문명의 두 기둥—‘계몽 이성’과 ‘서사적 진리’—를 모두 해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전통적으로 인간은 경험과 추론, 상징 체계를 통해 지식을 구성해왔지만, AI는 ‘이해하지 않고 판단하며, 설명 없이 예측한다’. 이 방식은 인간의 인식 기반을 무력화시키며 새로운 지식의 패러다임을 요구한다.


조선 후기의 상황도 비슷하다.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왔을 때, 그것은 단순히 새로운 도덕률이 아니라 세계의 존재론적 구조, 즉 하늘과 인간, 국가와 백성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사상이었다. 예를 들어,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교리는 유교 사회의 위계질서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따라서 당시 지식인과 권력자들은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정체성의 붕괴로 이어진다고 보았고, 그것이 박해의 뿌리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박해 속에서도 천주교는 확산되었다. 이는 '통제할 수 없는 새로운 지성체계’가 사람들에게 기존 질서에 대한 내면적 회의를 제공했다는 뜻이다. 오늘날 AI도 마찬가지다. 이미 알고리즘은 의료, 금융, 정치, 언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보조하거나 대체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더 정확한 판단’을 신뢰하고 있다.


3.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권력인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기술’이 단순한 도구인지, 아니면 새로운 권력의 형식인지에 대한 질문에 직면한다. 키신저는 AI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가 전략적 판단을 할 수 있게 된 전환점"이라 규정한다. 과거에는 도구가 인간의 보조자였지만, 이제 AI는 인간의 사유 체계 자체를 재편하려고 한다. 이 말은 조선 후기의 천주교도 단지 유입된 외래 종교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위치를 재정의한 새로운 권력이었음을 뜻한다.


조선이 이를 제도화하지 못한 채 억압과 배제로 대응한 결과는 참혹했다.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었고, 그 신앙은 지하로 잠행했으며, 사회는 분열되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AI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극단적으로 거부할 경우, 사회는 기술과 인간, 윤리와 편의, 효율과 존엄 사이의 균형을 상실할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술을 권력으로 보고, 정치적, 윤리적, 공동체적 대응을 설계할 수 있는 철학이다.


4.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 수용인가, 저항인가, 조정자인가?


조선 후기의 천주교 사례와 키신저의 제네시스는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새로운 질서가 출현할 때, 당신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① 무비판적 수용은 위태롭다. 조선이 그랬듯, 전통적 질서의 해체는 돌이킬 수 없는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② 완전한 배제도 위험하다. 외래 사상은 지워지지 않는다. AI 역시 제어할 수 없는 현실이다.


③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조정자(mediator)’로서의 자세다.


이는 새로운 기술이나 사상이 기존 체계와 어떤 충돌을 일으키는지를 분석하고, 기존의 질서와 어떻게 공존하거나, 변형하거나, 새롭게 구조화할 것인지에 대해 집단적 성찰과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이다. 조선 후기의 일부 천주교인들은 그런 조정자의 역할을 자임했고, 그들의 노력이 오늘날 한국 천주교의 뿌리가 되었다.


‘문명의 전환기’에 다시 묻는다


『제네시스』는 기술의 시대에 인간이 여전히 의미와 책임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조선 후기 천주교 역시 ‘신앙의 형식’보다 ‘신앙의 본질’을 찾으려는 자들의 투쟁이자 모색이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인공지능, 유전자 조작, 기후기술, 글로벌 플랫폼 같은 새로운 문명과 마주할 때, 우리는 기술을 통해 무엇을 더 잘할 수 있을지가 아니라,


기술로 인해 무엇이 달라지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성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결국, 새로운 권력은 언제나 온다. 문제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철학적 준비가 되어 있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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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Thomas Cole의 The Voyage of Life 시리즈 중 하나로, 인간 존재의 여정을 초월적인 목표로 향한 희망과 결단의 상징으로 묘사합니다. 안개 너머 미지의 풍경을 응시하는 순례자의 모습은, 문명 전환기의 도전과 성찰, 그리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려는 태도를 강력하게 환기시킵니다. 이는 조선 후기의 천주교 수용이나 AI 시대 앞에 선 인간의 자세를 메타포적으로 보여줍니다. The Pilgrim of the Cross at the End of His Journey (Thomas Cole,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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