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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VAYA May 27. 2024

유지나의 <모란>(feat. 김소유)

작사 이경 작곡 신재동

안녕하세요?

오늘 <가사실종사건> 주인공은 '유지나'입니다.

아래 노래 들으시면서 글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https://youtu.be/OxBzyHjlpOo? si=3 xCovPzrdJIjVqcS

엄마를 닮았구나 거울 속 나의 모습이

엄마를 닮았구나 눈가에 내린 주름도

모든 걸 닮았구나 세상을 사는 모습도

눈물도 웃음도 입맛까지도


엄마가 그랬었지 나처럼 살지 말아라

엄마가 그랬었지 남 하는 것 다 해봐라

여자라 참지 마라 어떠한 순간에도

언제나 엄마는 너의 편이라고


엄마가 그랬었지 내 나이 되면 안다고

엄마가 그랬었지 철들면 이별이라고

가진 것 그보다 더 몇 천 배 더 준 사랑

엄마가 지어준 밥이 먹고 싶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부를수록 먹먹한 그 이름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제발 아프지 마세요


사랑합니다 죄송합니다

아기처럼 점점 작아지는 울 엄마

다음 세상엔 그때는 엄마가

나의 딸로 태어나주세요


- 유지나의 <모란> 가사 중 -




유지나는 <저 하늘 별을 찾아>로 1998년 데뷔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국악을 시작해서 국악예술고등학교를 거쳐 국악학과를 졸업했을 만큼 말 그대로 국악인이었습니다. 민요 가수로 활동하다가 1988년 트로트 가수로 전향했습니다. 이때 영향을 끼친 인물이 조항조였다고 하죠. '남자라는 이유로'라는 노래를 듣고 트로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하네요.

처음에는 의도처럼 잘 안 돼서 긴 무명시절을 겪었는데요. 태진아 씨와 진성 씨 등이 그녀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많이 도와줬다고 하죠. 2005년 국악과 트로트를 접목한 <쓰리랑>,2008년 <쑈쑈쑈>, 2009년 <고추> 등이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요즘 분들에게 알려진 곡은 단연 2016년 <미운사내>입니다. 후배 트로트 가수들이 워낙 많이 커버를 했던 곡이죠.

오늘 곡은 2021년 <One's Love 3>이라는 미니앨범에 실린 곡입니다. 저도 김소유 씨가 커버를 해서 알게 노래인데요. 가사가 참 좋습니다. 모란은 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母(어미모) 糷(밥 짓다 란)의 한자어를 사용했는데요. 짓는 어머니 정도가 되겠네요.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니까 돌싱이 된 사연과 10억 누드모델에 대한 입장을 밝힌 부분이 눈에 띄더군요. 가난한 살림에 대학을 가려고 수면제를 먹으며 시위까지 했다고 하네요. 그 고마움에 보답하려고 가족에게 매년 6천만 원을 쓴다고 하는데요. 주는 기쁨이 커서 지금이 행복하다는 멘트가 많이 와닿았네요. 


자. 본업인 가사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실까요. 제목이 '모란'입니다. 위에서 설명드린 '밥 짓는 엄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려면 1차적으로 먹어야 하는데, 그걸 곁에 챙겨주는 사람이 엄마죠. 그 엄마가 밥을 통해 딸에 전하는 메시지를 늘 받던 화자가 이제 철이 들어 자신의 마음을 노래에 담아 엄마에게 보냅니다. 어떤 사연을 담았을지 가사를 쫓아가 보시죠.

'엄마를 닮았구나 거울 속 나의 모습이/ 엄마를 닮았구나 눈가에 내린 주름도/ 모든 걸 닮았구나 세상을 사는 모습도/ 눈물도 웃음도 입맛까지도'가 첫 가사입니다. 유전자의 힘으로 엄마와 생김새가 비슷한 화자입니다. 거울 속의 모습이 영락없는 엄마의 모습이죠.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성향도 닮았습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모습도 심지어 좋아하는 입맛까지도요. 엄마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인 것이죠.

'엄마가 그랬었지 나처럼 살지 말아라/ 엄마가 그랬었지 남 하는 것 다 해봐라/ 여자라 참지 마라 어떠한 순간에도/ 언제나 엄마는 너의 편이라고' 부분입니다. 엄마가 딸에게 하는 조언이 담겨 있죠. 그 안에서 끝없는 사랑이 느껴집니다. 자신의 신세를 딸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은 심정이죠.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다 해 보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여자라는 젠더로 인해 참고 살지 말라고 하죠. 본인이 끝까지 자신의 편이 될 거라면서요.

2절입니다. '엄마를 닮았구나 나이가 들어 갈수록/ 엄마를 닮았구나 아파도 참는 모습이/ 별 걸 다 닮았구나 용서에 넉넉해지고/ 예쁜 것 앞에선 미소를 짓고' 부분입니다. 딸이 철이 든 뒤에 깨닫게 되는 것들이 가사에 담긴 듯합니다. 1절 가사와 차별점을 찾자면 인생의 깊이가 더 해져 외모가 아닌 마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점이죠. 엄마의 길을 따라가는 화자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죠.

'엄마가 그랬었지 내 나이 되면 안다고/ 엄마가 그랬었지 철들면 이별이라고/ 가진 것 그보다 더 몇 천 배 더 준 사랑/ 엄마가 지어준 밥이 먹고 싶다' 부분입니다. 그때는 몰랐던 엄마라는 존재의 크기를 알게 되는 지점이죠. 세상에 영원한 존재는 없는 것이니까요. 자신을 받았던 사랑이 엄마의 희생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 것이죠. 그래서 엄마를 상징하는 '지어준 밥'이 그토록 그리워지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이 노래의 하이라이트는 '엄마 엄마 엄마 엄마/ 부를수록 먹먹한 그 이름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제발 아프지 마세요/ 사랑합니다 죄송합니다/ 아기처럼 점점 작아지는 울 엄마/ 다음 세상엔 그때는 엄마가/ 나의 딸로 태어나주세요' 부분입니다.

허리가 굽고 근육이 적어져 점점 작아지는 엄마의 모습을 안타까운 모습으로 바라보는 화자입니다. 지금에서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그녀의 건강뿐입니다. 이제는 그녀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줘야 하는 시간이죠. 하지만 시간이 그리 여의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화자는 다음 세상을 기약합니다. 엄마와 딸이라는 역할이 바뀐 채로 태어나 달라고요. 흑흑.


자. 오늘은 '밥을 짓는 어머니'가 아니라 '엄마가 짓는 밥'에 대해 썰을 좀 풀어볼까요? 장성해서 엄마의 품을 떠나 긴 객지살이라도 하다 보면 엄마가 해 준 밥이 그리도 많이 생각이 납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서 좋은 음식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먹어도 엄마가 해 준 그 밥이 그리도 먹고 싶은 거죠.

엄마가 짓는 밥에서는 '경제적 관념'이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식당에서 주는 밥은 원가도 따져야 하고 조리하는 시간도 감안해야 하지만 엄마가 짓는 밥은 오로지 먹는 사람의 건강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한나절 아니 일주일에 걸쳐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이유입니다. 물론 집에서 만드는 방식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파는 곳도 있지만 그만큼 손을 많이 탔기에 주인의 넉넉한 인심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가격이 상당하죠.

엄마가 해 준 밥을 셀 수 없이 많이 먹다 보면 그 고마움을 쉽게 간과하게 하게 되죠. 그래서 반찬 투정도 하게 되고 먹는 둥 마는 둥 하기도 합니다. 엄마는 아직 배가 불러서 그렇다고 타박을 하면서도 다음 끼니 때는 그 요구 사항을 최대한 들어주려 애쓰죠. 그게 엄마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런 엄마의 밥상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전업주부가 경제 활동에 참여하면서 집밥보다는 외식하는 일이 부쩍 늘었죠. 반찬가게를 이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고요. 오히려 집 바깥 음식을 주로 먹다 보니 엄마의 밥상이 어색해지는 진풍경도 펼쳐집니다. 조미료의 맛에 길들여진 우리 입맛 때문은 아닐까요.

엄마들은 어떻게 그 많은 음식 조리법을 유튜브 동영상 하나 보지 않고 뚝딱뚝딱해내는 걸까요? 어디에서 요리를 공식적으로 배운 것도 아닌데 말이죠. 아마도 그 요리를 반복적으로 한 회수와 연관이 될 듯한데요. 그만큼 눈감고 할 정도로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다 보니 쉬워진 것이겠죠. 그냥 되는 것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우린 엄마에게 요리하는 레시피가 예전부터 탑재되어 있는 것처럼 느끼며 엄마가 밥 하는 모습을 당연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엄마들은 밥 먹고 돌아서면 다음 끼니는 뭘 차려주나 하는 걱정을 시작합니다. 없는 살림에 장을 보러 가서 가장 적합한 재료를 사서 가족들의 입에 넣어주려고 온갖 머리를 짜냅니다. 그렇게 완성된 식탁인 것을 우린 어릴 적에는 미처 알지 못하죠. 철이 없던 시절 가격도 안 보고 비싼 음식이 먹고 싶다고 투덜대거나 심지어 다른 집과 비교를 해대는 불효를 하곤 했죠.

엄마의 밥이 있었기에 큰 병 안 걸리고 이제껏 잘 컸으면서도 그 값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죠. 그리고 철이 들어서야 그 밥의 진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엄마의 밥은 전 세계의 어느 밥상도 대체불가한 하나의 브랜드라는 사실을요. 아무리 돈을 주고 흉내 내려 해도 그 맛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요.

엄마의 밥은 그 자체로 기억이고 향수입니다. 짜면 짠 대로 매우면 매운대로 그녀만의 레시피는 우리들의 머릿속에 기억이 되고 향수가 됩니다. 그래서 집을 떠나 오래 생활하다 보면 그 기억이 문득 떠오르기도 하고 그리워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엄마의 밥이 생각나는 것은 그래서 단순히 '먹고 싶다'는 미식의 영역이 아니라 '보고 싶다'는 감정의 영역이 작동합니다. 힘들고 지친 하루를 보낸 후 아무 대가 없이 자신에게 차려주는 엄마의 밥상에 담긴 의미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을 뛰어넘는 위로의 의미가 더 큰 것이죠.

엄마의 밥상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존재가 무탈하다는 증거입니다. 엄마의 건강 상태가 나빠지거나 이 세상을 떠나 만 마주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죠. 우린 번거롭더라도 살아있는 동안 엄마를 좀 더 귀찮게 해서라도 그 밥상을 많이 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게 존재의 의미를 빛나게 하는 일일 수 있거든요. 다 큰 자녀가 '이거 정말 먹고 싶었어'라는 말을 연신 내뱉으며 엄마의 밥상을 끝없이 칭찬할 때, 엄마는 '그래. 내가 자식들 한 끼라도 더 해먹 일려면 건강해야지' 이런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한 달에 한 번 부모님 집에 꼭 들릅니다. 멀리 사는 것도 아니고 가까운 데 사니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한 번은 얼굴 보며 살자고 암묵적으로 동의가 된 것이죠. 엄마의 밥상이 그립지만 그걸 차리고 치우는 수고로움을 알기에 외식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엄마가 해 준 김치 등등은 꼭 챙겨서 가져옵니다. 거기에 담긴 계절의 흐름이 저에겐 엄마의 밥상을 연상시킵니다. 제철 음식을 많이 해 주시거든요. 여려 분들에게 엄마의 밥상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나요? 하하하. 오늘 브런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PS. 얼마 전에는 오이소박이를 가져왔네요. 이제 푹 익어서 입에 착착 감깁니다. 그전에는 파김치에 빠졌었고요. 뭐가 먹고 싶을 때마다 저는 적극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편입니다. 몸을 움직이며 사는 게 건강하기도 하고 그걸 더 좋아하십니다. 아 참 저의 어머니는 70대 중반이신데요. 아직도 주 2회 인라인을 타시고, 1년에 2번 21Km 대회에 참가하신 답니다. 이번에도 새만금 대회에 나가신다고 하고요. 언젠가 제가 <세상은 이런 일이>에 그런 엄마의 아들로 인터뷰할 날을 기대해 봅니다. 하하하. See you. Coming Soon.(NO.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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