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상이 좋다
저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습니다. 얼마 전에 작고하신 故 김우중 회장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을 고등학교 2학년 때 읽고 저는 경제학도의 꿈을 꾸었습니다. 경제학이 돈을 ‘잘’ 벌 수 있는 학문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입학 후에야 알았고 논란은 있지만 김우중 회장이 지금의 기준으로는 그렇게 훌륭한 경영인이 아니었다는 것은 졸업 후에 IMF를 겪고 나서 알았습니다. 여하튼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읽고 저의 진로를 결정했으니 처음 저를 움직인 사상은 ‘세계화’였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세계화를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지 애매하긴 하지만 제 인생의 지향점을 처음으로 설정한 사건이었습니다. 저를 움직였던 것은 동서로 갈라진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좁은 곳에서 싸우지 말고 세계의 젊은이들과 경쟁하라는 김우중의 외침이었습니다. 물론 어린 저에게 세계화는 체화되지 않은 채 타인의 영향을 받아서 생성된 날것의 생각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김우중이 주장한 세계화의 배후에는 신고전학파라고 불리는 경제 사조가 있었습니다. 자유무역, 시장주의, 민영화 등이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이었고 서울 올림픽 이후 개방사회가 된 대한민국도 이 사상에 편승하고 있었습니다. 신고전학파의 영향을 받아 민영화된 회사에서 지금 일하고 있으니 제가 진로를 선택하던 10대 이후 저의 인생은 다시 한번 신고전학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연륜이 있으신 교수님들은 대부분 케인즈 학파였고 소수의 젊은 교수님들을 중심으로 신고전학파가 포진해 있었지만, 이미 세계의 경제학 트렌드는 수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시카고 학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회 현상을 모두 경제학적 수학모델로 설명하려는 ‘게리 베커’라는 교수가 노벨 경제학상을 받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수학에 '젬병'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수학 좀 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대학 입학 후 수많은 수학 천재들 앞에서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천재 수리 경제학 교수님에게 수업을 들어도, 나중에 세계은행에서 일하게 되시는 유능한 교수님에게 통계학을 배워도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제게 유일하게 재미있는 분야가 있었는데 그것은 거시 경제학에서 배우는 신고전학파와 케인즈 학파의 논쟁이었습니다. 자유시장, 통화정책, 합리적 기대가설 등을 주장하는 신고전학파와 정부의 개입과 재정정책을 중시하는 케인즈 학파의 논쟁은 언제 들어도 흥미진진했습니다. 당시 한국 경제학을 이끌어가던 교수님들은 케인즈 학파였고, 시카고 대학을 나오신 K 교수님이 시카고 학파 경제학을 가르치셨습니다. K교수님이 수업시간에 케인즈를 칠판에 쓰기 전에 ‘케인즈 스펠링이 어떻게 되드라?’라는 농담을 자주 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필시 그분도 그분의 스승에게서 배운 농담이었을 것입니다. K교수님은 그 농담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듯했습니다.
특정 사상을 옹호하거나 비판할 실력도 갖추지 못한 주제에 김우중의 영향이었는지 저는 신고전학파를 지지했었습니다. 당시 관료주의와 권위주의에 물든 한국사회가 좀 더 개방적이고 열린 사회가 되기를 원하는 바람도 있었지만, 신고적 학파를 지지함으로써 저의 정체성을 수립하고 혼란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이 공부했던 마르크스 경제학도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의 일관된 사상체계로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존중했지만, 자본론은 알지 못할 의무감 때문에 하는 공부였을 뿐 저는 자본론에 끌리지 않았습니다.
신고전학파를 지지하던 제가 실존주의 철학을 좋아하게 된 것은 필연적은 아니더라도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청춘들이 그러하듯이 20대의 저는 뭔가에 억눌려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억압의 주체는 국가, 기성세대, 등이었습니다. 억압의 기제에서 해방되고 싶었습니다.
사르트르도 프랑스 공산당 활동을 잠시 했고,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결합시키려 노력하기도 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자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실존은 인간의 자율성과 주체성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던져졌을 뿐이고 우리는 자신을 ‘기투’하면서 즉 실존하면서 각자의 본질을 만들어갑니다.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는 그의 선언은 저의 태생적 환경적 억눌림의 감정을 해소해주었습니다. 무신론적 믿음과 타자론에서 보여준 사람들과의 관계, 특히 사랑에 대한 그의 부정적 견해도 염세적이긴 하지만 그 당신 저의 견해와 일치했습니다. 보부아르와의 계약결혼을 통해서 보여준 파격성은 결혼이 필요한가에 대해 고민하던 저에게 새로운 대안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BOBOs
대학을 졸업하고 저의 첫 직장은 인터넷 벤처기업이었습니다.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인터넷 산업을 선택한 것은 지인의 소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인터넷 기업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일확천금의 꿈도 꾸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인터넷 기업에서 일하면 할수록 좋아진 것은 인터넷 기업들의 문화와 그들이 추구하는 사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기술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제3의 물결’, ‘권력의 이동’ 등 엘빈 토플러의 책들이 인터넷 기업에 뛰어든 사람들의 사상적 배경이었습니다. 혁신, 공유, 평등, 지식, 수평, 네트워크, 정보. 당시 제가 이끌렸던 사상적 키워드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세상을 좀 더 자유롭게 하고 저도 자유로워지는 것이 저의 사상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BOBOs(Bourgia Bohemian)가 되는 것이 저의 꿈이 된 것입니다.
미국에서 근무할 당시 저의 상사는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를 다룬 ‘아이콘’이라는 책을 저에게 선물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저의 BOBOs에 대한 사랑은 더욱더 깊어졌습니다. 당시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을 만들기 전이었지만 애플에 복귀해서 아이튠즈, 아이팟 등 혁신적 상품을 만들어내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는 단숨에 IT 사상에 있어서 저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그가 세상에 보여주었던 혁신적 사고방식은 아직도 저의 업무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제가 부르주아(Bourgia)가 될 확률은 굉장히 낮지만 보헤미안(Bohemian)이 될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반의 꿈을 이룰 가능성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30대에도 저는 ‘자유’를 꿈꾸고 있었네요.
마흔이 되면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고 했던가요? 제가 실존주의와 마르크스 철학 이외의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시기도 40살 즈음부터였습니다. 동서양의 주요 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입시를 위해 달달 외웠던 철학자들을 중년이 되어 삶을 위해 다시 만난 것입니다. 어렸을 때 (당연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찾아내는 즐거움이 쏠쏠했습니다. 회사 옆 공공도서관에서 빵으로 저녁을 때우며 중고등학생 사이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면서 노트북에 옮기다가 옆 학생이 시끄럽다고 컴플레인해서 쫓겨났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일과 병행하느라 힘들었지만 먼저 살다 간 현인들의 사상으로 둘러싸여 사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40대에 들어와서 공부한 철학자 중에서 저를 가장 많이 변화시킨 사람은 노자였습니다. 나이 영향도 없지 않겠지만 저는 지혜가 쌓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 블로그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철학자가 노자일 것입니다. 그만큼 40대의 저에게 중요한 철학자라는 뜻입니다. 노자는 제 사상과 반대되는 것들을 물리치던 저에게 반대되는 것과 나의 것을 함께 보면 더 밝은 지혜가 생긴다고 가르쳤습니다. 도덕경을 읽은 뒤로 저의 사상을 보는 관점과 세상의 대립되는 사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사상을 뒤집어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긴 것입니다. 지금은 어떤 책을 읽을 때 그 책과 반대되는 내용의 책도 함께 읽습니다. 제 생각을 정립하는 데에 도움기 되기도 하지만 사상을 깊이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존 밀턴은 자유론에서 말도 안 되는 주장도 막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나의 생각을 견고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노자와 존 밀턴의 충고를 따를 수 있는 이유는 제게 사상적 여유가 생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렸을 때 주위의 분위기에 휩쓸려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이제 없습니다. 100분 토론을 볼 때에도 편을 가르고 보지 않습니다. 결론도 안 나고 합의가 되지 않더라도 서로 의견이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고 재미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대립적인 사상이 존재합니다. 창조론과 진화론, 일원론과 이원론, 진보와 보수, 유시민과 홍준표, 친중론과 친미론, 공자와 노자, 밀턴 프리드만과 케인즈, 기대승과 이황, 이율곡과 노승의 논쟁, 가다머와 하버마스, 프로이트와 칼 융, 성장 경영과 가치 경영……
한국사회에 사상의 양극화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SNS와 유튜브가 부추기고 있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사상이 양극화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정 사상에 속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입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절대적인 사상이란 없습니다. 그 시대에 필요한 사상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상이 진리인가는 좋은 질문이 아닙니다. 어떤 사상이 지금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적합한가 가 올바른 질문입니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지금 여기에 어떤 사상이 필요한 것인가를 논해야 할 뿐입니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사상은 본인만의 향기가 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세돌의 바둑이 이창호의 바둑보다 세지만 이창호의 팬이 더 많다고 합니다. 이창호의 바둑은 많이 이기지 못하더라도 본인만의 기와 예가 있기 때문에 자체로 아름다운 바둑이라고 평을 합니다. 우리의 사상에도 그런 측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일, 글, 말 그리고 행동에서 나의 사상이 깊게 묻어 나온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습니까? 이쪽 편을 들지 않으면 내가 손해를 볼 것 같아서 지지하는 사상은 사상이 아닙니다.
샐러리맨의 사상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드라마 ‘미생’에서 김동식 과장이 장그래에게 ‘샐러리맨이 승진과 돈 아니면 무슨 의미가 있냐?’라고 말하자 장그래가 깊은 생각에 빠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장그래가 아쉬워했던 것이 아마도 샐러리맨의 사상이었을 것입니다. 한 개인으로 잘 살아내기 위해서 세상과 나를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듯 한 샐러리맨으로서 회사에서 잘 살아내기 위해서 회사와 나를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회사란 무엇하는 곳인가? 나의 회사는 어떻게 경영되어야 하는가? 나는 그 안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나의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런 사상과 관점이 없이 일하는 것은 자신을 자발적으로 회사의 노예로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던 회사는 돌아갈 텐데 그런 사상과 관점은 왜 필요하냐고 묻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도 그렇습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대로 세상은 돌아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주관을 세우기 위해서 관점은 필요합니다. 나의 사상대로 세상은 돌아가지 않고 나도 온전하게 나의 생각대로 살아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상은 나의 생각을 깊게 하는 도구이자 다른 사람과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도구입니다. 설사 나의 사상대로 살아지지 않았더라도 나의 생각은 깊어져 있을 것입니다. 깊은 생각은 깊은 인생을 낳습니다. 깊은 생각은 나의 관점과 타인의 관점이 부딪치고 융합하는 과정에서 그 범위를 넓혀 나갑니다. 샐러리맨을 끝내고 언젠가 퇴사를 할 때 그런 관점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너무 허무하지 않을까요? 소확행이 젊은 샐러리맨의 대표 사상이자 가치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모두 일본의 포기한 세대를 뜻하는 사토리(悟り)세대가 아니라 한자 원문 뜻처럼 깨달은(悟) 세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