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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울 Jun 04. 2022

그림 그리는 삶의 평범한 행복

푸르게 빛나는 코르도바의 종탑

  

Violinist of Córdoba, Sony a6000 (2018)


예술가의 삶이란 무엇일까요. 그림을 그리며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참 오랫동안 물었던 질문입니다. 

그림을 그리면 행복하고,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생활비를 아껴 재료를 사야 하는, 그림을 위해 많은 걸 내려놓았던 시간 속에서 ‘먹고 살 수는 있겠느냐’는 걱정을 마주하게 되면 선뜻 답하기가 어려웠어요.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않더라도, 언제가 되어서야 평균의 삶에 도달하게 될까요. 매일을 열심으로 채우면 언젠가 가능할까요? 그렇다면 얼마나,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 걸까요.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며 하루하루 스스로 길을 찾던 나날은 마치 깊은 바다 속에서 수면을 향해 무한히 헤엄치고 있는 듯했어요.

코르도바에는 긴 수면을 벗어나 마침내 첫 숨이 터진 순간이 있어요. 만약 그림을 그리던 순간을 모아 한 편의 영화로 만든다면, 코르도바 여행은 영화의 아름다운 장면만을 모아둔 하이라이트와 같습니다.

메스키타 성당의 종탑을 바라보며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던 한낮의 풍경, 그리고 그림을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푸른 밤. 코르도바엔 그림의 기억이 가득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다시 자신의 가능성을 의심하게 될 때마다, 코르도바의 풍경을 다시금 찾곤 해요. 오늘은 코르도바 종탑에 담긴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Torre Campanario, Sony a6000 (2018)


코르도바의 푸른 밤

새로운 곳을 향하게 되면 매일의 장소에 머물렀다면 만날 수 없었을 인연을 얻게 됩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는 건 흥미로운 일입니다. 모든 사람에겐 각자의 세계가 있어요. 운이 좋은 날엔 비슷한 색으로 세상을 그려온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행운이 찾아온 도시는 남다른 의미로 기억됩니다. 

코르도바에서도 새로운 사람이 만나고 싶어 에어비앤비에서 마음에 드는 모임을 찾아 참여했어요. 메스키타 성당이 보이는 테라스에서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었습니다. 기대를 품고 찾은 모임 장소는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높은 담장 너머 모습을 숨기고 있던 메스키타 성당과 커다란 종탑이 가까운 거리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푸르게 물들어가는 풍경앞에 서있습니다. 절로 탄성이 나오는 풍경이었어요.  





모두가 풍경을 감상하고 자리에 모여들었어요. 스페인산 와인과 하몽, 치즈가 차례로 나오고, 사람들은 서로를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임엔 코르도바에서 나고 자란 두 명의 호스트를 포함해 영국, 호주, 그리고 미국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은퇴를 앞둔,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었어요. 세계적인 경제 불황과 은퇴 후의 삶에 대해 나누는 대화에 끼어들기 어려워 조용히 와인을 마셨습니다. 오늘은 멋진 장소와 와인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 모습이 신경 쓰이셨는지, 어른들이 저에게 대화의 공을 넘겨주셨습니다. 젊은 아가씨가 늙은이들과 저녁을 보내게 되어 실망스럽겠다, 농담을 걸어주셨어요. 손사래를 치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말하며 챙겨온 그림엽서를 선물로 드렸습니다. 여행하며 만난 분들에게 주려 가방 가득 챙겨갔었거든요. 수채로 그린 그림이고 지금은 한 단계 성장하고 싶어 여행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유독 한 분이 유심히 엽서를 보시며 눈을 반짝이는 게 보였습니다. 엽서를 지긋이 바라보시더니 저를 보고 웃으시고는 말씀하셨어요. '너는 화가로구나!, 그런데 나도 그림을 그린단다'. 알고 보니 그분은 평생 그림을 그린 화가이지, 지금은 대학에서 그림을 가르치고 계신 교수셨어요.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 작품을 보여주셨는 데, 그 분 역시 수채를 주재료로 쓰시는 분이셨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었어요. 뜻밖의 정체에 정말 놀랐고, 신이 났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 분에게 많은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화가로 평생 살아간 어른을 만난 일은 난생 처음이었거든요. 



그림 그리는 삶의 평범한 행복

어떻게 해야 그림을 더 잘 그릴 수 있을지,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아갈 수 있을지.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지만, 이게 정말 맞는 방향인지 모르겠다고. 그나마 이뤄놓은 모든 걸 내버려 두고 여행을 시작했지만 무엇도 이루지 못하까 두렵다는 말까지 두서없이 털어놓았습니다.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어 창고 속에 꼭꼭 감춰두었던 질문들이 와르르 쏟아지고 있었어요. 

그분은 처음으로 만난 연고 없는 젊은이의 고민을 모두 들어주셨어요. 자신의 젊은 날을 돌아보시며 제 고민을 참 깊이 공감해주셨습니다. 긴 이야기 끝에, 그분은 빙그레 웃으시며 말해주셨어요.

'넌 정말 잘하고 있단다. 그림을 위해 여행까지 떠난 자신을 믿으렴. 봐, 가진 것 하나 없이 그림을 좋아했을 뿐인 내가 이렇게 잘살고 있지 않니.' 

순간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어요. 정말 가능한 일이었던 거에요. 행복하게 나이 든 화가는 있었습니다. 내내 막연한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화가가 전해주는 격려의 말은 뜻깊게 다가왔습니다. 감동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저를 그분의 부인이 꼭 껴안으며 말씀해주셨어요.

'나는 화가의 배우자로 평생을 살았단다. 그이는 돈을 한 푼도 벌지 못할 때가 많았어. 하지만 보렴, 내가 불행해 보이니? 나는 화가와 함께 살며 행복했어. 그 삶은 영광이었단다. 사랑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건 참 멋진 일이야. 너 또한 네 삶을 응원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란다. 나 역시 네 삶을 응원해.'

두 분의 따스한 눈빛이 저를 위로했습니다. 나 또한, 저토록 다정한 눈빛으로 나이 들고 싶었습니다.  


Salud!(건배!) 종이에 수채, 2019



그 밤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요. “Salud(살룻)!” 여러 차례 잔을 가볍게 마주하며 건배를 외쳤습니다. 높다란 종탑이 보이는 테라스에서 아름다운 코르도바의 풍경을 바라보며 잔뜩 흥겨워졌어요. 달콤한 와인과 멋진 치즈, 훌륭한 하몽까지. 부족함이란 없었습니다. 모임에 모인 분들의 젊은 날의 기억들과 아름다운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며 삶을 배웠어요. 모두가 잔뜩 취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마음이 따스하게 채워지던, 짧게만 느껴지는 밤이었어요. 그날 밤의 기억을 그림으로 그리며 코르도바의 풍경만큼 아름다웠던 사람들의 온기를 담았습니다. 

예정되어 있던 모임 시간이 훌쩍 지나 모두가 취해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두와 진심 어린 포옹을 하며 작별을 했어요. 꼭 껴안아주시며 그 분이 건네주시던 말이 선명합니다. 

'이제 너는 나의 제자란다. 내 이름을 알지 않니? 언제고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연락을 주렴.'   



단순히 잘 그려내는 기술의 차원을 넘어, 나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잘 그려내는 것만으로도 녹록지 않은 데, 온전한 나의 이야기를 찾는 과정은 정말 어렵고 때론 괴로운 일이에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그림을 그릴 때면 봉우리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산을 넘는 기분이 들곤 합니다.

깨끗한 종이 위에 첫 붓질을 하기 전이면 늘 설레임과 긴장이 함께 합니다. 붓질이 시작되면 그림은 끊임없이 대화를 걸어요. 다음 붓질은 어디에 할 건지, 비어보이는 이 부분은 어떻게 채울 건지. 언제가 완성인지 알 수 없는 그림은 한 번 시작되면 멈추지 않습니다. 

혼자 오롯이 채워내야 하는 빈 종이를 마주하며 막연한 두려움을 느낄 때, 저는 다시 기억 속의 그 테라스를 찾습니다. 그 테라스엔 두 부부를 포함해 제 삶을 응원해준 친구들과 가족, 동료들이 있어요. 그들이 전해주었던 따스한 응원을 기억합니다.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그 뒤엔 수많은 사람들의 응원과 사랑이 있습니다. 그 힘으로 그림을 계속해서 그려갑니다. 

가끔 그런 상상을 하곤 해요. 사랑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 테라스에 함께 모여 다정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잔뜩 응원받아 기쁜 얼굴로 “Salud!” 건배를 외치는 모습을요. 


코르도바의 한 테라스에 앉아, 가울 드림 


Blue night of Córdoba, Sony a6000 (2018)





매달 그림과 글을 한 편의 레터로 엮어 발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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