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나다, 산 크리스토발의 석양
산 크리스토발을 향해 가파른 알바이신 언덕을 오르면 골목마다 알알이 박힌 자갈들이 가득 보입니다. 오래된 자갈들은 사람들의 걸음에 닦여 맨들맨들한 광이 났어요. 노을이 도시 위로 퍼질 때면 둥그런 돌들은 노을빛을 받아 붉은 빛을 내곤 했습니다. 언덕을 따라 펼쳐진 붉은 길은 마치 석류알이 흩어진 듯 했고, 그 모습을 볼 때면 ‘이 도시가 ‘석류’라는 의미의 ‘그라나다(Granada)’라 불려지게 이유는 이런 모습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언덕 위 작은 공터에 자리잡은 산 크리스토발 전망대의 돌담에 앉으면 발 아래 그라나다가 가득했습니다. 먼 곳에서 자유로이 달려온 바람이 가벼운 외투 너머로 부딪히고 날아갑니다. 한없이 맑은 부피의 바람 속에는 아득한 향이 배어있습니다. 안달루시아의 바람은 꼭 기타 소리를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자유롭게 흘러가고,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게 꼭 닮았습니다.
낮 동안 뜨겁게 익어 따뜻한 온기를 품은 돌담에 앉아 날아가는 나비와 하나 둘 떠오르는 별들을 발견하며 푸른 하늘에 맑은 홍조가 스미길 기다리면 조금씩 사람들이 돌담에 모여들었습니다. 운이 좋은 어느 날엔 누군가의 기타소리가 공기를 채우곤 했지요. 하늘은 조금씩 색을 덧칠하며 붉어졌고 하늘 반대편에선 이르게 얼굴을 내민 작은 달이 밤을 끌고 서서히 떠올랐습니다. 그 작고 희미한 달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순간을 참 사랑했습니다. 매일 몇 번이고 석양을 바라보기 위해 자리를 옮겼던 어린왕자처럼, 가능하다면 그 곁을 떠나지 않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고싶을 지경이었습니다.
시선 끝 저 먼 시에라네바다 산맥 위에 태양이 내려앉으면 낮 내내 따갑게 빛을 내뿜던 태양이 비로소 잠잠해져 모습을 허락합니다. 지평선에 가까워진 태양은 새삼스럽게 커다랗고, 둥글게 보였어요. 그 선명한 붉음은 어떤 색으로 표현해야 할까요? 하루는 마음을 먹고 재료를 챙겨가 그 석양을 그렸지만, 꼭 맞는 색을 찾기가 퍽 어려웠습니다. 그 그림이 편지의 가장 첫 부분에 있던 'San cristobal sketch (2018)'이에요. 그 그림은 지금 오랜 친구에게 전해졌어요.
낮을 품고 떠나가는 커다란 빛은 하루의 기억을 머금습니다. 눈을 태우는 강렬한 색채와 함께 지난 하루의 기억이 마음 깊숙히 기록됩니다. 커다란 풍경의 한 부분일 뿐인데, 기억 속의 태양은 시야를 꽉 채우는 크기로 기억됩니다. 그만큼 강렬하게 타오르기 때문이겠지요? 그 아름다움은 매일을 바라보아도 익숙해지지않는 찬란함이었습니다. 석양의 순간이 끝나고 밤이 찾아오면 이 순간을 오래도록 그리워하리란 직감이 들곤 했습니다. 매일의 석양에 그토록 간절했던 건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떠한 분주함없이 석양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나날이 언제 또 찾아올 수 있을까요. 떠나기도 전에 저는 다시 그리움을 쌓고 있었습니다.
언덕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점차 서늘해지고, 석양을 볼 때면 외투를 입어야 하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라나다의 가을이었어요. 가을은 그라나다를 떠나야하는 계절이었습니다. 무척 좋아하는 계절임에도, 가을의 신호를 발견할 때마다 서글퍼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웠던 날들에 슬픔으로 안녕을 고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산 크리스토발은 저에게 무척 특별한 곳이었으니까요.
산 크리스토발은 두려움을 이기는 그리움의 힘을 알려준 장소였습니다. 세상 곳곳의 이야기를 품고 싶어 떠난 여행이지만, 그다지 많은 이야기를 품지 못한 채 끝이 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립고 그리워 돌아온 그라나다지만, 사실은 덧칠된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상상되는 모든 미래는 실망스러웠고, 영영 피하고 싶은 두려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두려움보다 크게 자라난 그리움은 결국 긴 여행을 시작하게 했고, 산 크리스토발 언덕으로 발걸음을 이끌었습니다. 처음으로 오른 산 크리스토발에서 마주한 석양의 풍경은 잊을 수 없는 전율이었습니다.
그런 산 크리스토발을 떠나며 언젠가 다시 이 언덕을 오를 그 날을 그리워할 내일을 위해, 오늘의 찬란함을 담은 그림을 그리며 작별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림을 바라보는 동안 쌓여가는 그리움 만큼 이 장소에 다시 돌아올 날은 다가오고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그림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올랐던 산 크리스토발의 풍경과, 닿지 않을 듯 서로 닿아있던 태양과 달의 모습, 평야에서 점점히 빛나던 도시의 모습과 함께 그저 머무는 것 만으로 행복할 수 있었던 그라나다와의 포옹을 하나의 그림에 담아내고 싶었어요. 그리고 완성된 그림은 '그라나다와의 작별'이란 이름이었다가, 곧 'Good morning, Good night'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라나다에게 건낸 첫 인사와 작별, 그라나다에서의 낮과 밤이 모두 이 곳이었습니다.
산 크리스토발엔 언제나 노을지는 하늘이 있습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알바이신 언덕을 올랐던 모든 사람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저 편의 석양을 바라보았겠죠. 오늘도 산 크리스토발엔 석양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을거에요. 그 사실이 주는 위안이 있습니다. 언제이고 다시 돌아가 변치않았을 그 풍경을 재회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해요.
그리움을 오해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부러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지 않으려 했었어요. 후회와 그리움을 미처 구분하지 못했던 어리숙한 시절이었습니다. 산 크리스토발은 그리움이라는 감정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장소입니다. 그리움은 사랑하는 순간이 남긴 증거이며 그 순간들이 모여 오늘을 풍성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마치 산 크리스토발에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다시 한 번 그리운 순간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언덕을 오를 날을 고대하며 글을 썼습니다. 언젠가 이 모든 시간이 흐르고 다시 한 번 돌아가 산 크리스토발의 석양을 바라볼 순간까지 부디 건강하시기를.
산 크리스토발의 기억을 담아 가울 드림
매달 그림과 글을 한 편의 레터로 엮어 발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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