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범의 꼬리 –산동네 할아버지와 기억 속의 꽃길

가야의 꽃 이야기

by 가야

꽃범의 꼬리 – 기억 속의 꽃길


아주 오래전, 이십여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청운동에서 신정동으로 이사 온 뒤, 나는 새벽마다 오르던 인왕산이 그리워 향수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척도서관으로 향하는 산책길에서 작은 골목길 하나를 만났습니다.


도서관 끝자락과 맞닿은 그 길은 시골 산속 마을이 아닌, 소박한 ‘산동네’였습니다. 그런데 그 좁은 골목 양옆을 가득 채운 보랏빛 물결이 눈길을 붙잡았습니다. 그곳에 흐드러지게 핀 꽃이 바로 꽃범의 꼬리였지요.


나는 그날, 처음으로 이 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한 노신사의 작품이었습니다.

◆ 할아버지의 꽃길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꽃길을 만들 생각을 하셨는지 여쭈었을 때, 할아버지는 옛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군 복무 시절, 근무지 근처에 누군가 가꾼 화사한 꽃길을 본 적이 있었답니다. 그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 제대 후에는 꼭 자신도 그런 꽃길을 가꾸며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하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양천구 갈산공원 앞, 지금의 우성아파트 자리에 집을 마련한 할아버지는 실제로 다짐을 실천하셨습니다. 그곳의 꽃길은 봄부터 가을까지 화려했습니다.


죽단화며, 창포, 상사화, 백합이 차례로 피고 지며 계절의 흐름을 전했고, 마당 한쪽에는 손수 큰 욕조를 가져다 벼를 심기도 하셨습니다. 볏짚을 얻기 위함이었지요.


그러나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꽃길은 사라지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습니다. 할아버지는 보상금을 받아 비슷한 조건의 터를 수소문하다가, 고척동 고척근린공원 옆을 찾아 다시 집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꽃길을 가꾸셨습니다.

◆ 내 일상의 꽃길


그 무렵 나는 매일 아침, 그 산동네 할아버지의 꽃길을 걷는 일을 하루의 일과처럼 삼았습니다. 연보랏빛 꽃범의 꼬리 사이를 걷는 것은, 인왕산을 오르며 느꼈던 새벽의 그리움을 대신해 주는 시간이었습니다. 꽃향기와 함께, 사람의 손길이 만든 아름다움이 내 마음의 허전함을 달래주었지요.


하지만, 세월은 또다시 그 자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도로 확장 공사로 할아버지의 집은 철거 대상이 되었고, 결국 그곳에서도 떠나야 했습니다.


지금은 고척도서관을 갈 때마다, 이미 도로가 되어 버린 그 자리를 찾곤 합니다. 할아버지는 어디로 이사 가셨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 찍어둔 사진 속에는 여전히 보랏빛 꽃범의 꼬리와 함께 환히 웃던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 꽃범의 꼬리의 이야기


꽃범의 꼬리(학명 Physostegia virginiana)는 북아메리카 버지니아 지방이 원산지인 꿀풀과의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이름처럼 꽃차례가 범의 꼬리처럼 길게 뻗고, 꽃을 좌우로 움직이면 잠시 그 자리에 머물러 ‘Obedient plant(순종하는 식물)’이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그러나 땅속줄기로 빠르게 번져나가 주변을 점령해 버리기에, 한때는 ‘퇴출된 원예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범의 꼬리는 여름부터 가을까지 풍성하게 피어, 보는 이에게 진한 인상을 남깁니다.

◆ 꽃말

꽃범의 꼬리의 꽃말은

정숙, 순종

총명함

자유로운 영혼, 개성


즉, 하나의 꽃 안에 서로 다른 성질이 공존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순종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자기 멋대로 방향을 바꾸는 자유로운 영혼.


나에게 꽃범의 꼬리는 단순한 관상용 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노신사가 평생 간직한 다짐과, 매일의 내 일상을 지탱해 주던 기억의 꽃입니다.


지금도 고척도서관 길을 걸을 때면, 꽃범의 꼬리 사이로 걷던 그 시절의 나와, 꽃길을 가꾸던 할아버지가 함께 떠오릅니다. 그분의 행방은 알 수 없지만, 그 마음만큼은 여전히 이 길 어딘가에서 꽃처럼 피어 있겠지요.


https://youtu.be/9Q2Em40jths?si=mI52_bJ-6DexaRXf


#꽃범의 꼬리 #보랏빛꽃 #여름과 가을사이 #꽃이 주는 이야기 #기억 속의 꽃길 #순종과 자유 #브런치감성 #꽃에세이 #식물이야기 #가야의 꽃이야기


매거진의 이전글사철베고니아와 꽃집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