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글방
창밖의 공기가 서늘해지고 거리마다 캐럴이 나직하게 깔리기 시작하면, 기억은 자연스레 오래된 책상 서랍 속으로 향합니다. 그곳에는 이제는 빛이 바랜, 그러나 여전히 초록이 선명한 카드 몇 장이 잠들어 있습니다. 성탄의 상징, 호랑가시나무가 그려진 카드들입니다.
종이는 세월을 머금어 가장자리가 살짝 일그러졌고, 잉크는 한층 얌전해졌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만큼은 조금도 닳지 않았습니다. 봉투를 열던 순간의 숨소리, 종이를 펼칠 때의 마찰음, 그리고 손글씨가 건네던 체온까지. 카드 한 장은 늘 그렇게 한 해의 온도를 품고 있었습니다.
호랑가시나무는 참으로 묘한 식물입니다. 잎 끝은 호랑이 발톱처럼 날카로워 손을 대면 금세 찔릴 듯하지만, 그 가시 사이에 맺힌 열매는 놀라울 만큼 둥글고 붉습니다. 경계와 온기가 한 몸에 깃든 나무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식물은 오래전부터 크리스마스의 상징이 되어 왔습니다.
기독교 문화에서 호랑가시나무의 가시는 고난의 면류관을, 붉은 열매는 희생의 보혈을 상징한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 상징이 유난히 무겁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끝내 붉은 결실을 맺는 그 생명력이 우리의 삶과 닮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정의 행복’, ‘평화’라는 꽃말 또한 이 나무에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1843년, 영국에서 헨리 콜 경에 의해 세계 최초의 크리스마스 카드가 만들어진 이후, 호랑가시나무는 카드 삽화의 단골 손님이 되었습니다. 성탄의 인사를 건네는 작은 종이 위에 사람들은 늘 이 나무를 그려 넣었습니다. 추위를 이겨낸 초록과 붉은 열매는 ‘무사히 한 해를 건넜다’는 조용한 안도의 표시였기 때문입니다.
19세기 후반, 빅토리아 시대의 크리스마스 카드는 단순한 인사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작은 예술품이었습니다. 수채화와 석판화, 금박과 엠보싱 기법이 동원되었고, 자연 모티프는 특히 사랑받았습니다. 호랑가시나무와 담쟁이, 겨우살이 같은 식물들은 계절의 감정을 대신 전하는 언어였습니다.
이 시기 영국의 장식예술을 이끌었던 윌리엄 모리스 역시 호랑가시나무를 즐겨 다루었습니다.
그의 패턴 속 호랑가시나무는 종교적 상징을 넘어, 자연과 노동, 일상의 아름다움을 회복하려는 태도 그 자체였습니다. 크리스마스 카드에 그려진 호랑가시나무가 유난히 정갈하고 품위 있게 느껴지는 이유도, 아마 그 시대가 ‘손으로 만든 것’의 가치를 깊이 믿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크리스마스 카드 문화가 본격적으로 스며든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일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과 대학 시절의 12월은 온통 ‘카드의 계절’이었습니다.
문구점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고른 카드 한 장, 밤늦도록 앉아 한 글자씩 눌러 쓰던 연하장. 어떤 해에는 머메이드지를 자르고 직접 호랑가시나무 잎을 그려 넣기도 했습니다. 손끝에 묻은 반짝이 가루가 며칠을 가도 지워지지 않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는 연말에 받은 카드와 연하장의 두께가 한 사람의 삶을 가늠하는 조용한 기준이 되기도 했습니다. 거실 한편이나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봉투들은 인기를 증명하는 수단이라기보다, 내가 그 해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안부가 되는 존재’였는지를 보여주는 훈장 같았습니다. 우체부 아저씨의 가방이 불룩해질수록, 동네의 연말 공기도 함께 부풀어 올랐습니다.
이제 세상은 훨씬 빨라졌습니다. 스마트폰의 짧은 메시지와 이모티콘은 즉시 도착하고, 읽음 표시로 안부는 확인됩니다. 편리해진 대신, 우체통 앞에서 발걸음을 늦추며 기다리던 시간, 봉투를 뜯기 전 잠시 숨을 고르던 설렘은 우리 곁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매년 연말이 되면 우리는 여전히 ‘사랑의 열매’를 가슴에 답니다. 그 열매가 바로 호랑가시나무의 붉은 열매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나, 가족, 그리고 이웃이라는 세 개의 열매가 모여 하나의 나눔이 되듯, 우리가 주고받았던 카드는 결국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가장 느리고, 가장 따뜻한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카드를 씁니다
올겨울에는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펜을 다시 꺼내 보려 합니다. 화면 속에서 매끈하게 정렬된 글자가 아니라, 종이 위에서 사각거리며 남겨지는 조금은 투박한 손글씨로 안부를 전하고 싶습니다.
호랑가시나무의 날카로운 가시가 추위와 악운을 막아준다는 옛 이야기처럼, 제가 보내는 카드 한 장이 누군가의 시린 겨울을 막아주는 작은 울타리가 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당신의 책상 위에는 올해, 몇 장의 다정함이 쌓이고 있나요.
· 호랑가시나무 요약 정보
· 식물명: 호랑가시나무
· 영명: Holly
· 학명: Ilex aquifolium
· 특징: 윤기 있는 짙은 초록 잎과 날카로운 가시, 겨울에도 떨어지지 않는 붉은 열매
· 상징과 의미: 고난의 면류관, 희생의 보혈, 보호와 수호
· 꽃말: 가정의 행복, 평화, 선의
· 문화적 의미: 크리스마스 카드와 장식의 대표적 식물, 겨울을 견디는 생명력의 상징
https://youtu.be/TNCRdo3IO6A?si=5dkQAEMc9C7CXDoz